둘째 날
새벽에 깨서 움치락거리다 5시 반이 되자 가만가만 일어나 씻고 얼굴에
크림을 바르려고 조그만 가방을 여니 비닐 봉투 속에 들어 있던 씨씨크림
튜브가 뺑뺑하게 부풀어있다. 재밌다고 웃으며 뚜껑을 열었더니 조금 남은
크림이 마구 솟구쳐 나온다. 어제 가이드가 멕시코시티가 우리나라 제일 높
은 산보다 높은 고원지대라 숨이 차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하는 징후가 나타
날 수 있다고 했는데 깜빡잊고 있다가 크림튜브를 보니 실감이 난다. 아직
내 몸은 괜찮은 것 같다.
조금 일찍 아래 식당으로 내려가니 직원들 외에 나 혼자다. 멕시코 음식과
치즈, 과일 등 아침 식사가 좋아보인다. 혼자 먼저 먹고 올라가 나갈 준비를
하고로비로내려가니아직모두들식당 테이블에앉아대화중이다.조금
기다려 버스를 타러 밖으로 나가니 쌀쌀하다. 우리는 어제 갔었던 대성당
으로 다시 들어가 어제와 마찬가지로 컨베어벨트를 타고 성모님께 인사를
드린다. 이곳은 대성당의 제대 아래층으로 성당 안에서는 제대가 벽과 간격
이 조금 떨어져 있고 성화는 그 뒷벽에 걸려 있어 들어오면서 아래층에서
올려다 볼 수 있고 성당 안 모든 곳에서도 같은 마리아님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과달루페 성모님이 선택한 후안디에고의 후손인지 작고 단단하게 생
긴 멕시코 사람들이 잠시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성당으로
들어온다. 성당은 어제 저녁에도 오늘 아침에도 관광객과 현지 순례자들로
붐빈다.
잠깐 성당을 다시 구경하고 우리는 화장실을 찾아 헤맨다. 가이드가 일러
주는 대로 광장 건너편으로 황급히 간다. 멕시코엔 공중 화장실이 많지 않
고 모두유료다.돈을주면육중한철창이열리고화장지도주인들이한번
겨우 쓸만큼씩 접어서 준다. 게름직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매번 감옥에 들
어가는 기분이지만 그나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왜 가이드가 어제 버스에
서 내리자마자 성물가게 화장실을 언급했는지 이해가 간다. 안은 비교적 깨
끗하고텅텅비어있다. 화장실에볼일보러가는일이이렇게힘들수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우리는 급하게 동전을 외치고 서로 주고 받으며 웃는
다.
오늘은 아침 미사가 예약되어 있어서 우리는 부지런히 움직인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장소를 중심으로 큰 광장이 있고 그 안에 대성당을 비롯해 유럽의
건축물을생각나게하는몇개의소성당이있다. 미사시작전어제아녜쓰
자매에게 성의 없이 대답했던 일이 생각나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성가를
골라번호를 알려주고입당성가를부르는데교회안에서내목소리가너
무나 크게 울린다. 감격스러우면서도 한편 아무렇게나 미사에 임하려고 했
던 내 행동이 갑자기 부끄러워진다. 오늘 저녁부터는 성서를 보고 다음날
쓸 성가를 골라놓고 자야겠다고 생각한다. 신부님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독
서를 하는 로사자매님의 목소리가 성당에 울려퍼진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주변을 돌며 건축물을 구경하고, 발현하실 때의 모습이
며 메시지와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멕시코 원주민인 후안 디에고에
게 4차에 걸쳐 나타나신 곳을 차례로 돌아본다. 원주민들이 마리아님께 경
배하는모습의커다란동상들을본후, 끝없이이어진계단을올라가니또
성당이 있다. 성당에 들어가 잠시 묵상을 하고 함께 묵주기도를 하는데 바
로 옆에 열려 있는 나무문 사이로 바람이 들어와 살랑살랑 내 온몸을 스친
다. 갑자기 다빈치의 성화 ‘수태고지’ 가 떠오른다. ‘그대로 내게 이루어지
소서’ 겸허히 받아들이시던 성모님… 율리아나 자매가 무언가 느낌이 크게
다가온 모양이다. 뒷모습이지만 어깨가 들썩거린다. 밖으로 나오니 멕시코
시티가눈아래펼쳐진다. 한쪽벼랑위에먼저나오신신부님께서커다란
철십자가 아래 서 계시는데 햇빛을 등지고 실루엣처럼 보이는 그 모습이 인
상적이다. 앞으로의그분의생을그한장면이다말해주는것같다. 가슴
으로 무언가 찡하며 훑고 지나간다.
우리 일행은 성당을 나와 조그만 미술관으로 들어가 성화를 감상한다. 성
서가 보급되기 전 교육과 선교의 자료로 성화가 많이 쓰였다고 한다. 무거
운 십자가를 진 수사님들이 넘어지시는 순간순간들을 만화 영화를 만드는
기법처럼 단계로 포착해서 한 폭에 그린 특이한 성화 앞에서 한동안 바라본
다. 몇 분이 매점에서 기념품을 산다. 조금 뒤에 누군가 가만히 다가와 눈부
신 성모님 그림이 있는 벽걸이를 살짝 건내준다. 사랑이 느껴진다.. 사랑이
란 언제 어떤 순간이고 항상 마음 속에 있는 것인 것 같다. 그래서 무엇을
할때마다그순간에사랑의대상이떠오르는것아닐까, 가족이건친구건
이웃이건… 가슴이 뭉클한다.
부지런히 둘러보고 우리는 다시 버스로 아즈텍의 유적이 있는 떼오띠우아
깐으로 향한다. 중간에 식당에 들려 멕시코 전통 음악을 들으며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하고,습기가하나도없는사막느낌이나는주변과 날씨를코
로 눈으로 느끼며 차에 오른다. 길 양쪽으로 여러 종류의 선인장들이 커다
란 나무처럼 높이 솟아 있고 생전 처음 보는 후추 나무에는 붉은 후추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오래전 원주민들이 수확했을 저 후추는 모두 스페인
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덜컹거리는 길을 달려 조금 들어가니 아즈텍의 유물
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해가 너무 뜨겁다는 가이드의 말에 입구에 죽 늘어
선 모자 가게에 들려 모자들을 하나씩 산다. 또 그냥 가려는 내게 누군가 핫
핑크 모자를 씌워주신다. 사랑은 주는 것이라는 데 나는 드릴 줄을 모른다
고 생각하며 일행을 따라 들어간다.
초입에 특이한 건축 자재를 썼다는 왕궁 터 안 쪽으로는 벽화들이 희미하
게 남아 있다. 그곳에서 나와 조금 걸어가니 이집트의 피라밋 처럼 생긴 달
의 신전과 해의 신전 등 제단들이 끝이 안 보이게 양쪽으로 늘어서 있다. 다
리에 자신이 있는 로사 자매님과 신부님, 아녜스, 세실리아 모니카 자매가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이곳의 피라밋은 무덤이 아니라 여자와 아이
들을 산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었다고 한다. 이 지방 특유의 선인장을 섞어
이음새에 못처럼 박아 놓은 벽과 계단의 무늬가 신기하면서도 퀼트를 해 놓
은 것 같아 친근해 보인다. 그 옛날의 핏자국과 아픔은 잊고 멋진 기하학적
풍경에 빠져 핸드폰으로 사진을 수도 없이 찍는다. 우리 성당의 아름다운
모델들을 세워놓고… 선인장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으며 한바탕 웃고
우리는 다시 버스에 올라 멕시코 시티에 있는 인류사 박물관으로 향한다.
오후 5시쯤 현대식 건축물인 박물관에 도착하니 입장 시간이 지나서 가이
드가왔다갔다애쓴다. 가방검사를받으며겨우들어가 박물관의고대원
주민 유물들이 있는 곳을 보기로 한다. 사람 모양의 화병 등 붉은 흙으로 빚
은 도자기들과 장식품, 세라믹 타일들이 섬세하다. 불과 500년 전까지도 뱀
을 숭배했던 문화의 흔적, 산 사람의 심장을 수도 없이 제물로 바치던 제기
들의한가운데피가빠지도록구멍이있는것을보니섬찟하다. 왕과귀족
을 제일 높은 곳에 두고 사제 다음으로 군사, 생산자, 노예들을 피라밋 형식
으로 배열해 흙으로 구운 유물을 한참 들여다본다. 자신을 제물로 바쳐도
아무말 할 수 없었던 여인들이나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노예들. 인류가 생
긴 이후로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한 번도 없었던 적이 없었을 계급제도를
눈으로 보는 것 같아 그 앞을 쉬이 떠날 수가 없다.
저녁으로 어제 갔던 한식당에서 김치 전골과 불고기를 먹으며 웃음으로 마
무리 하고 호텔까지 걷는다. 호텔 부근은 안전지대라 걸어도 괜찮다고 한
다. 8시에 아래층에서 모이자는 약속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잠시 쉬며 내일
미사에 부를 성가를 고르기 위해 매일 미사책을 펼친다. 입당을 39번 ‘하나
되게 하소서’ 로 결정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또 제일 먼저다. 내 문제 한 가지를 또 발견한다. 약속 시간보다 항상 너무
일찍 서두르는 것. 조금 기다리니 아녜스자매와 세실리아 자매가 내려온다.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