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분들 이야기 제6편 김진숙(로사) 자매님 산티아고 가는길

20111113

각자의 짐은 철저히 자신만의 것

PAMPLONA    PUENTE LA REINA  24KM

성벽의 가장자리를 따라 도시를 벗어났다. 오늘 걸을 거리는 24km. 어제와 비슷한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바람이 무척 심하게 불었다. 끝도 없을 것 같은 밀밭 사이를 걸어 고지대에 있는 갈라르 (Galar) 로 올라왔다. 빵과 커피로 휴식을 취하면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고원 건조의 지중해성 기후라 모든 집들이 창문은 물론 덧문까지 닫혀 있었다. 바닥에 그림을 새겨놓은 돌길이 한없이 이어지는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이 지긋한 노인들뿐이었다. 모두 표정이 온순하고 카미노만 외치면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셨다. 어떤 때는 우리가 묻기도 전에 먼저 카미노 쪽을 가리키신다. 그리고 “Buen Camino!”  (좋은 길이 되기를) 하고 외쳐 주기도 하시고. 어떤 할아버지에게 빈 병에 물을 부탁하니 집에서 큰 물통을 가지고 나와 계속 병에 물을 채워주셨다. 물을 마실수록 흐뭇해하는 듯한 할아버지의 표정에 보답이라도 하듯 난생 처음 물을 배부르게 마셔보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천연 화장실을 수시로 이용하게 됐으니….

다시 광활하게 펼쳐지는 밀밭 사이를 걸어 페르돈 고개 (Alto de Perdon) 를 넘기 시작했다. 같이 떠난 사람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바람이 심하게 부는 페르돈 언덕길을 올라갔다. 해발 750m 고지의 페르돈 (Perdon) 언덕 위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했다. 맨 위를 보면서 걸으면 너무 힘들 것 같아 앞만 보며 올라갔다. 한 번 쉬려고 앉으면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속으로 가위바위보를 하며 내가 이겼다 하면서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도달했다. 페르돈고개도많은 순례자들이 힘들어 하는 코스인데 그 보다 배는 높았던 피레네 산맥을 넘어서인지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올라온 것 같았다. 순례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철 조각들과 풍력 발전기들이 돌고 있었다. 용서와 화해, 회개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 고지는 바람이 무척 세서 그냥 서 있기도 힘들었다. 보따리 장사한테 콜라 한 캔을 사서 마신 후 배낭을 추스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내리막길은 급경사로 험하고 온통 자갈길이었다. 내려갈 땐 몸의 무게가 발 앞으로 쏠려 발가락과 무릎에 통증이 심하게 왔다. 신음 소리가 저절로 나왔지만 언니가 신발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내 아픔은 푸념밖에 안 될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걷기만 했다. 더 큰 아픔과 비교했을 때 내 아픔은 작은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크건 작건자기의아픔은100으로느껴진다. 각자 자신이 진 짐은 철저히 자신 만의 것이었다.

넘어질까 온 정신을 집중해 한 시간 이상을 내려오니 고요한 우테루가 (Uterga) 가 나타났다. 순례자를 위한 쉼터의 성모상 앞 벤치에 라라소냐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었던 프랑스 집시 아가씨가 보였다. 기타를 치며 집시풍의 구슬픈 노래를 하고 있었다. 반가웠다. 20분 정도 쉬면서 집시 아가씨의 라이브 공연을 들었다. 처절한 듯 마음을 울리는 노래가 웬만한 샹송 가수의 솜씨였다. 이 마을에서 묵겠다는 그녀와 작별을 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아직 오늘 목적지까지는 8km 정도 남았다. 비수기인데다 항상 늦게 출발하고 늦게 도착하니 걷는 도중에는 순례자들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자디잔 돌들로 범벅이 된 능선을 따라 내려왔다. 지대가 높은지 멀리서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차들이 아스라이 보였다. 얼마 후 중세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오바노스 (Obanos) 에 도착했다. 이곳은 중세부터 시골 귀족의 마을이라고 불릴 정도로 나바라의 부호들의 모임이 자주 있었던 마을이었다. 또한 비극적인 남매의 전설이 내려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14세기에 오바노스의 아끼따니아 공작에게는 펠리시아와 기옌이라는 젊은 남매가 있었다. 어느 날 딸인 펠리시아는 종교적 소명을 받고 나바라의 영지인 계곡에 있는 아모까인으로 은둔해 들어갔다. 그러자 오빠인 기옌이 동생을 데리러 그곳까지 쫓아갔는데, 펠리시아가 계속해서 돌아갈 것을 거부하자 분노하여 동생을 죽였다. 그 후 기옌은 회계하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산티아고까지 순례를 떠났다. 그는 마침내 수사가 되어 오바노스 근처의 아르노떼기에서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들을 도와주며 울면서 여생을 보냈다는 전설이 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고즈넉한 시골길을 한참 가다 보니 멀리 고지대에 높은 성당의 탑이 보이고 안개에 둘러싸인 듯한 마을이 아스라이 보였다.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는 성당의 저 첨탑이 내 믿음으로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천국의 계단처럼 높아 보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푸엔테 라 레이나 (Puente la Reina) 에 당도해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길에 돌다리가 있었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여섯 개의 아치가 있는 아름다운 왕비의 다리였다. 11세기 나바라왕 산초 3세 왕비의 후원으로 세운 푸엔테 라 레이나 다리로 마을 이름도 이 다리의 이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돌다리를 건너자 높은 언덕이 나타났다. 알베르게는 그 언덕 위에 있었다. 오늘도 내게 주어진 체력을 하나도남김없이소모해야쉴수있을것같았다.있는힘을다해또올라가는수밖에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한발 한발 힘겹게 올라오니 언덕 위에는 순례자를 위해 만든 마을이라 곳곳에 카미노 상징들이 서 있었다. 십자가가 세워진 바위에 성 야고보의 상이 서 있었고 바위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구가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었다.

저녁 7시경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한국인 두 아가씨를 비롯하여 낯익은 얼굴들이 반겨주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아 모두 작은 방 하나에 모여 있었는데 오늘도 역시 위층 침대만 남아 있었다.

샤워를 한 후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영양을 보충한다고 커다란 사이즈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데도 소스 냄새가 역하고 너무 질겨서 먹을 수가 없었다. 스페인 음식은 대체적으로 맛이 있고 한국 사람 입맛에 맞는데 우리에게는 먹는 운이 따라와 주질 않는다. 식당마다 저녁 8시 이후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리는데 몇 사람만 드문드문 앉아 있는 분위기에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었다. 맞을 필요도 없는 예감이 맞았다며 포만감은커녕 홀쭉한 배를 잡고 우리는 한바탕 웃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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