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14일
다양한 순례길에 감탄하다
PUENTE LA REINA → ESTELLA 24KM
8시쯤 알베르게에서 나와 템플 기사단에 의하여 설립됐고 오랜 세기 전 게르만 순교자가 기증한 Y자형 십자가상을 모시고 있다는 십자가 성당 (Iglesia de Crucifijo) 에 가 보았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오늘도 역시 자갈길이었지만 어제보다는 좀 편안한 길이었다. 밀밭과 포도밭이 대조를 이루는 넓은 들판에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길이었다. 11월에도 파아란 새싹들이 뾰족뾰족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밀인지 보리인지 알 수 없는 늦가을의 밭들, 농업 국가임을 실감나게 하는 평원이 계속 펼쳐졌다. 평화롭다. 높은 지대에 포도밭 또한 어마어마하게 이어졌다. 언니는 뒤에 아득하게 쳐져 있다. 쉬었다 가자고 소리치는 언니의 불평을 뒤로 하고 철저히 혼자만의 세계에서 나만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끝없이 펼쳐진 벌판을 걷고 또 걸었다. 걷는 동안은 모든 문명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간 듯 땅의 소리와 땅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시간마다 울리는 종소리와 더불어 오늘의 목적지인 에스테야 (Estella) 를 3.5km 남겨놓고 성모승천 성당이 있는 비아뚜에르타 (Villatuerta) 라는 제법 큰 마을로 들어왔다. 여느 마을처럼 중세기 당시 스페인의 종교와 생활상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자갈이나 돌로 다양하고 운치 있게 도로 포장이 되어있고 대부분의 집 창가에는 정열의 나라답게 빨간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수준 높은 예술적 정서를 보는 것 같았다.
마을을 빠져 나와 내리막길로 접어들며 다양한 순례길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 자갈길, 흙길, 도로길 (도시의 도로) , 진창길, 들판길, 오솔길, 시멘트길, 지그재그길….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카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의 길은 중세 시대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스페인 정부에서 현 시설을 보충하였다고 한다.
‘좋은 빵과 훌륭한 포도주 모든 종류의 행복함이 있다’는 도시인 에스테야 마을로 들어섰다. 수공업자가 모여들어 상업이 번성했던 카미노의 오래된 도시 중 한곳이다. 친절한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제법 깨끗하고 큰 에스테야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언니는 몸살감기로 몸이 벌벌 떨린다고 하며 약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다행스럽게도 내 몸은 여기저기 아프고 힘들지만견딜만했다. 오늘은 레스토랑에서 ‘메뉴 델 디아 (오늘의 정식요리)’ 로 저녁을 근사하게 계획했었는데 할 수 없이 혼자서 부엌으로 내려갔다. 브라질과 캐나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만들고 포도주를 마시며 떠들썩하게 파티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맞아주며 음식과 와인을 권했다. 잠시 후 언니도 몸을 추스르고 내려오고 차정임, 오한나씨도 합석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내일 와인은 우리가 사겠다고 하니 자기네가 먼저 도착하고, 우리는 항상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 올 테니 그럴 기회가 없을 거라며 모두 웃었다. 10유로를 주면서 내일 먼저 도착해서 좀 사놓고 기다리라고 부탁했는데도 극구 사양하며 우리가 도착하면 박수로 환영하겠다던 순례자들. 그들은 일찍 떠나 조금씩 더 많이 걸었으므로, 이후로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다. 순례의 길에서 종종 만나 같은 알베르게에서 함께 먹고 자고 돕기도 하고, 힘들었던 하루를 말하지 않아도 다 이해하는 순례자들은 서로에게 끈끈한 동지의식을 느끼는 것 같았다. 더 함께 할 수 없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