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분들 이야기 제11편 김진숙(로사) 자매님 산티아고 가는길

교우분들 이야기 제11편 김진숙(로사) 자매님 산티아고 가는길

20111118
시에스타에 철저한 스페인

NAVARRETE NAJERA 19KM

그래도 몇 시간 잔 것 같은데 일어나니 온몸이 붓고 천근만근이었다. 언니도 최악의 상태인 것
같았다
. 우리 자매는 누가 더 아픈지 경쟁이라도 하듯 서로의 괴로움을 호소했다. 거울을 보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 그동안 내 발에는 별 이상이 없었고 발보다 한 치수 큰 등산화라
헐렁하기까지 했는데 오늘 아침엔 발이 퉁퉁 부어 신발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 오한나씨와
차정임씨가 걱정이 되는지 떠나지를 못했다
. 8시에는 알베르게를 나와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정신력으로 버티어볼 각오를 하고 일어났다
.

콜라 한 캔씩 사서 마시고 짙은 안개가 낀 도로를 지나 평원으로 접어들었다.집에서는잠자는
데 문제가 없었는데 너무 피곤해서인지 불편한 잠자리 때문인지 그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것 같았다. 걸어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없는 상태에서 지독히 아픈 몸을 철저히무시하며그냥죽을힘을다해걸었다
.언니는자주길에
털썩 주저앉아 힘들어 했다
.

한 두 시간쯤 지나니 신기하게도 몸에 기운이 되돌아오는 것 같았다. 점점 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하고 순례자들이 만든 돌무덤에 얹을 예쁜 돌이 눈에 띄기도 했다
. 육체가 건강해야 정신이
맑다는 말대로 사물에 대한 느낌이 다시 시작되었다
. 벤토사로 향하는 내리막길에 그동안 가끔
보아왔던 순례자의 추모비가 보였다
. 자전거로 순례를 하던 벨기에 여자였다. 다시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올라가 뒤따라 오는 언니를 바라보니 작은 물체로 보이며 멀리서 걸어 오고 있었다
.
나 또한 언니가 보면 작은 물체로 보일 것이다. 조금 더 먼 곳에서 나를 본다면 난 하나의 작은
점이겠지
….

언니를 20분쯤 기다려 벤토사 (Ventosa) 에 도착하여 아주 조그만 카페에 들어갔다. 이곳을
지나쳤다는 도장을 받고 커피와 케이크를 좀 먹었더니 몸이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
나마저 아프면 안 된다는 긴장감이 몸을 빨리 회복시켜준 것 같았다.

언니는 도저히 더 이상은 한 발자국도 떼어놓을 수 없다고 하여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어느
마을이나 택시나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 택시는 언제나 전화로 부를 수 있지만 시골 마을의
버스는 하루에 한두 번밖에 다니지를 않아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 여기서 목적지
나헤라
(Najera) 까지는 10km 남았는데 택시로는 15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언니만 태워 보내고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 휴대전화를 가지고 오지 않아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오후 4~5
사이에 마을로 들어가서 문을 연 첫 번째 알베르게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

언니를 보내고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 낯선 길을 걸어갔다. 아침은 흐리고 짙은 안개가
끼었었는데 오후엔 더운 여름날씨 같았다
. 다시 포도밭과 밀밭 사이를 가뿐이 걷고 있는 내
체력에 나도 놀랐다
. 이런 체력을 물려주신부모님께감사하며잠시풀밭에앉아빈병에남은몇
방울의 물로 목을 축이려 머리를 하늘로 향하려는데
“Are you thirsty?” 여름 복장을 한 여자가
유창한 영어로 자기 물을 주며 옆에 앉았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캐나다 여자로 오랫동안
꿈꾸어 왔던 이 순례를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해서 이곳을 거쳐 콤포스텔라까지 완주할
예정이라고 했다
. 모두 친절하고 서로 도와주는 카미노, 인정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순례의 길은 많은 사람이 혼자 걸었다
.

언니는 조금 회복이 됐을까? 걱정스럽다. 포도밭이 끝나고 공장지대가 시작되었다. 지저분한
공장 벽에는 스페인 시들이 씌어 있었는데 순례자를 위한 어느 신부님의 작품이라고 한다
.
지나치는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마음의 눈길을 선사받으며 세 시간쯤 걸어 나헤라 마을에
들어섰다
. 로마 시대에 세워진 이 도시를 아랍인들은 바위 사이의 도시, 나사라 (Naxara) 라 불렀다
하는데 여기서 올려다 본 산의 모양이 정말 특이했다
. 그동안 느꼈던 다른 도시의인상과달리
어수선하고 세련되지 않은 마을 같았다
. 사람들의 표정도 무뚝뚝했다. 지금까지 받았던 친절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
.

작은 마을에는 보통 두세 개, 큰 도시에는 여러 개의 알베르게가 있는데 지금은비수기라문을
닫은 곳이 있었다
.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며 알베르게 사인 화살표를 따라가는데 맞은편에서
언니가 걸어왔다
. 10년 만에 만나는 사람처럼 반가웠다. 언니는 근처 호텔에 들어가 쉬다가 나를

만나러 알베르게로 가는 길이었다. 조금 회복된 듯했다. 언니의 몸 상태 때문에 오늘부터는
호텔에서 묵기로 했다
.

어디에 묵거나 일단은 알베르게에 가서 크레덴시알에 도장을 받아야 했다. 도장을 받고 오늘 밤
잠을 푹 자기 위해 수면제를 사려고 주위를 살피니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약국도 깜깜했다
.
시간을 보니 330분이었다. 정말 어느 곳이나 오후 2시부터 4~5시까지 시에스타를 철저히
지키는 나라이다
. 인간 관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선입견과 호감도와 주어진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 사람 시각으로 본다면 이 나라는 온통 나태한 사람들뿐이다
. 선조들의
문화유산과 빼어난 자연 환경도 스페인 사람들의 큰 자산으로 한 몫을 하고 있어 많이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

호텔로 들어가 간신히 영어 몇 마디 하는 호텔 직원에게 수면제를 스페인 말로 적어달라고
했다가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 시에스타가 끝나는 오후 5시까지 기다렸다가
초록색 십자가가 있는 약국을 찾아갔다
. 호텔 직원이 적어준 쪽지를 내미니 자기 약국에는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 다시 나와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한 여자가 친절하게 앞장서 그
가게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 ‘Craft Store.’ 속으로는 이 집 아닌데 하면서도 들어가 쪽지를
보여주니
큰 것? 작은 것?”하고 물었다. “많이? 아니면 적게?” 하고 묻는 것 같아 이왕이면 많이
사자 싶어
많이하는 쪽에다가 손을 들었더니 웬 커다란 베개를 가지고 나왔다. 다시 나와 다른
약국을 찾아가니 여자 약사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우리도 이런 것은 안 판다고
. 호텔 직원이
적어준 쪽지는 잠을 편안하게 잘 수 있는 푹신한 베개였던 것이다
.

지친 몸으로 2~3km를 더 걸어 손짓, 발짓으로 절실히 필요한 수면제를 샀지만 고생한 보람도
없는 밤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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