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9일 두 번째 순례길을 떠나며
후회가 꿈을 대신할 때 사람은 그 자리에 안주하며 더욱더 늙어간다고 한다. 앉아서 가는 세월을
기다리느니 기울어가는 한 해의 가을에 순례의 길을 걸으며 세월을 맞이하고 싶었다.
2011년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는 부르고스까지 300여 km를 걷고 나서,
나는 다시 부르고스에서 시작하는 나머지 500여 km를 꼭 완주하리라 다짐했었다. 거대한
에너지가 끌어당기는 것 같은 이 카미노를….
간절한 바람에 이번에도 고맙게 남편이 허락해 주었다. 지난번 같이 걸었던 언니는 형부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혼자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비수기이고 걷기에 좋은 10월 9일을 출발하는 날로 정하고 한 달 여정의 비행기 표를 예약하며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긴 여정이라 배낭은 재질이 좋은 튼튼한 것으로 새로 구입하고 신발은
작년에 신고 고이 모셔두었던 등산화를 신기로 결정하였다. 한 달치 생활 용품을 담을 배낭
꾸리는 작업은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작년의 경험을 되살려 아쉬웠던 점들을 보완하고 나름대로
여러 가지 준비를 철저히 하며 몸을 단련시켰다.
오랫동안 혼자 집을 지킬 남편을 위해 냉동실과 냉장고에 가득히 음식을 만들어 놓고 떠날
준비를 끝냈다.
2012년 10월 9일
다시 돌아온 부르고스 대성당
CHARLOTTE → MADRIDBURGOS
드디어 한 달 여정의 순례가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작년에 이어 나머지 순례의
길을 걷기 위해 10월 8일 오후 2시 40분 US Airways로 샬롯 공항을 떠났다. 오후 4시 30분에
필라델피아 공항에 도착하여 다시 저녁 6시 비행기로 갈아타고 10월 9일 아침 8시 50분에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도착하였다. 공항을 나오니 섭씨 25도의 가을 날씨로 하늘이 아주
맑았다.
버스 터미널(Avda. de America)에서 오전 10시 40분에 출발하는 부르고스로 가는 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지난번 경험도 있고 나름대로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두려움과 설렘이 번갈아
가며 밀려왔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어려운 결정을 해 준 남편과 통화하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포장이 잘 되어 있는 길 양쪽으로 수확을 끝낸 밀밭이 한참 이어지더니 부르고스까지 37마일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순례의 길 상징인 노란 화살표와 순례자 형상의 문양을 다시 보니
지난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며 다시 걸을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두려움과 걱정이 모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배낭을 메고
지하실에서 2층까지 하루에 몇 번씩 오르락내리락 연습을 하다가 다친 허리가 아직 쑤시고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공장 지대와 시내를 한참 지나 마드리드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여 만에 낯이 익은 부르고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려 작년에 위치를 알아두었던 대성당 근처에 있는
알베르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16세기에 스페인의 황제 카를로스 5세를 맞아들이기 위해
개축한 산타 마리아 성문을 지나니 부르고스 대성당이 보였다. 낮에 보는 부르고스 성당은 지난
여정 마지막 밤 불빛 속에 서 있던 성당의 황홀하던 모습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지만 여전히
감격스럽고 아름다웠다. 알베르게를 찾아가는데 한국 학생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알베르게 문앞에서 10여 명의 순례자들과 함께 30분 정도 기다렸다. 5유로를 받는 이
알베르게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공립 알베르게이며 개인 사물함까지 준비된 현대식
건물이었다. 문을 열자 작년에 발급 받은 크레덴시알에 이번 순례의 첫 스탬프를 받아 소중하게
플라스틱 백에 넣고 배정받은 2층 침대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다시 대성당 광장에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 순례자들은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출발하여 함께 걸으면서 친구가 된 한국 젊은이들로 워싱턴 D.C. 포토맥에서
오셔서 이곳에서 순례를 마치시는 신부님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나도 그들과 어울려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대성당 앞 벤치에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순례자의 동상과는 대조적으로
300km를 걸어온 그들의 모습은 매우 활기에 넘쳐 있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나라의 국력을
보는 것 같았다.
일부 순례자들이 순례를 마치는 곳이기도 하며 새로운 순례자들이 출발하는 곳이기도 한
부르고스는 1037년부터 1492년까지 이슬람의 마지막 왕국인 그라나다 함락 전까지 400여 년
동안 카스티야 레온 왕국의 수도로 번성하였던 도시이다. 지금은 인구 20만 명의 부르고스 주의
주도이며, 직물. 화학. 고무 생산지로 스페인의 중요한 산업 도시이다. 부르고스를 대표하는
대성당은 스페인에서 알람브라 궁전, 알바이신 지구, 그라나다 도시, 코르도바 도시와 더불어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또 톨레도, 세비야 대성당들과 더불어
스페인의 3대 고딕 양식 성당 중 하나이며 성모 마리아를 모신 대성당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10여 명의 수녀님들이 어느 노신부님의 설명을 들으며 성당 내의
작품들과 건축 구조에 최상의 감탄을 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경탄하고 있었음이 틀림
없었으리라’. 나도 조용히 과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각 회랑들과 다채로운 형상의 조각 등
수많은 작품을 감상하고 성모 마리아를 모신 작은 예배실에서 무사히 순례의 길을 마칠 수
있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리고 나왔다. 레콩키스타 (국토회복운동) 당시 부르고스가 낳은 스페인의
전설적인 영웅 기사인 엘시드 (본명: 로드리고 다스 비바르) 의 동상과 초상화를 감상하며 그의 유해가
안치된 대성당에서 무한한 아쉬움을 남기고 나왔다. 우리나라에서도 동명의 영화로 상영한 적이
있어서 나에게는 먼 곳에서 만난 친근한 이름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성당에서 나와 근처의 도심을 흐르는 강변을 잠시 걷다가 플라타너스 나무의 신록이 우거진
노천카페에 앉아 샐러드와 한국 순대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그 지방의 대표적 민속음식인
모르시야 (Morcilla de Burgos) 라는 음식을 시켰는데 내 입맛에는 너무 느끼해서 먹기 힘들었다.
시에스타가 끝난 양쪽의 가게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지만 순례자들의 모습도 관광객들도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곳을 빠져 나와 시 청사가 있는 마요르 광장을 돌아보았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6월 중에 3일
동안 베드로와 바오로 성인 축제가 열리는데 이 축제는 부르고스에서 가장 큰 행사이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더니 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바닥에 새겨진 조개껍질 문양을 따라
알베르게로 돌아오니 많은 침대가 비어 있었다.
옆 침대에 자리 잡은 프랑스 여자가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반겨주었다. 브르짓드라고 하는
다정다감한 프랑스 여인과 서로 소개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못 만났던 딸이
바르셀로나에 사는데 오늘 저녁 8시 정각에 대성당 정문 앞에서 만나 레온 도시까지 같이 걷기로
했다며 즐겁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대충 정리한 한 달치 생활 용품을 담은 배낭을 바라보며좁은침대에누우니
또 다시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왔다. 짐을 꾸릴 때 이것저것 챙기며 몇 번을 넣었다 뺏다 하며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은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긴 것 같은데도 배낭이 터질 것 같았다. 고생을
자처했지만 이 아픈 허리로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한 달을 어떻게 보낸단 말인가. 내일
시작부터 힘들기로 유명한 메세타 지역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계획한
대로 완주하겠다고 다짐하면서 잠을 청했다.
2012년 10월 10일
어떠한 고통도 끝은 있구나
BURGOS → HONTANAS 33KM
다른 순례자들보다 먼저 일어나 오늘 마실 물, 간식 무게까지 합쳐진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지니
몸이 약간 휘청거리며 허리가 욱신거렸다. 모든 순례자들이 8시까지는 알베르게를 나와야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관리인이 빨리 나가라고 독촉을 했다. 밖으로 나오니 초겨울같이 쌀쌀하고
구름이 잔뜩 끼어서 흐리고 뿌연 날씨였다. 알베르게 문앞에서 어제 만난 신부님이 여러
학생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계셨다. 나도 인사를 하고 나서 성당 앞 광장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도넛으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였다. 드디어 부르고스에서 시작하는 순례의 첫 길을 나섰다.
순례자들이 서둘러서 떠났는지 한국 사람들 외에 다른 나라 순례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부르고스에서 대도시 레온 (Leon) 까지 185km인 이 지역을 메세타 (Meseta) 지역이라고 하며
카미노에서 가장 혹독한 이 길은 명상의 길이란 별칭이 붙어있기도 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이
지역은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에 있으며 중앙 고원에 펼쳐진 ‘카스티야’라 불리는 황토 빛깔의
황야지대이다. 해발 600m에서 1200m 높이에 광대한 평원과 고원지대인 메세타 지역은 체력에
자신이 없는 순례자들의 경우 레온까지 버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부르고스에서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500km이다. 오늘은 순례 첫날, 집에서
여러 번 생각을 바꿔가며 걷는 구간을 계획한 첫날의 33km, 온타나스 (Hontanas) 까지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시를 빠져 나와 메세타 지역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밀밭길로
들어섰다. 15kg 이상의 무거운 배낭을 진 활기차고 자신감에 넘치는 한국 학생들이 처음엔 나와
보조를 맞추며 걷다가 한마디씩 인사를 하고 한 사람 한 사람 앞서 가버렸다. 한 20분쯤 지나 긴
산등성이를 따라 끝없이 펼쳐지는 밀밭 사이에서 그들은 움직이는 작은 물체로 보이더니 금방
굽이굽이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왕년의 마라톤 선수가 하이웨이를 달리면서 같은
선수로 달리는 아들이 점점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게 하는 어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어차피 혼자서 걷고 싶었으니까.
혼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며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끝없는 지평선, 단조로운 허허벌판인
메세타 지역의 밀밭길을 배낭의 무게와 허리의 통증과 싸우며 걷고 또 걸었다. 두 시간쯤 지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잔뜩 흐린 날씨로 분명하게 예고했다는 듯이 바람을 동반한
굵은 빗줄기가 피할 곳 없는 황야를 때리며 판초비옷도 아랑곳없이 속옷까지 적시고 있었다.
믿는 것이라고는 내 몸은 이런 모진 상황에서도 잘 적응한다는 것, 며칠 지나면 어떤 고통도
면역이 된다는 것, 작년 피레네 산맥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위험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다음날
멀쩡하게 살아남은 경험 등이었다.
행진에 행진을 거듭하여 몇 시간을 빗속을 뚫고 왔는지 앞에 성당 탑이 보이며 오닐로스 델
카미노 (Hornillos del Camino) 라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성당 정문 앞에서 비를 피하며 두 명의
자전거 순례자와 20분쯤 기다리니, 시커먼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은 그대로인데 비는 서서히
그쳐가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일기 예보가 전혀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특히 북부 지방의 날씨는
변화가 심하고 비는 계절과 상관없이 내린다고 한다.
자전거 순례자들이 떠난 성당 앞에서 간식으로 산 점심을 을씨년스럽게 먹고 있는데, 어제 옆
침대에서 잔 브르짓드가 쓰러질 듯 딸과 함께 다가왔다. 우리는 빗속을 뚫고 걸어온 동질감에
서로를 반겼다. 여기 알베르게에 같이 묵자는 그녀의 권유를 뿌리치고 나는 계획한 대로 남은
11km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시간을 보니 오후 3시였다.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는 험한 날씨에
경사진 질척한 길을 넘으니 밀밭이 끝나고 구름과 비 때문에 더욱더 시커멓게 보이는 밭들로
이어졌다. 양말, 바지, 속옷까지 흠뻑 젖어 걸음이 더욱더 느려지며 큰 돌덩이를 등에 진것같이
허리가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정말 혹독한 시련이었다. 겨우 한나절인데. 하지만 이겨내야 하고
이겨낼 수 있다고 내 자신에게 다짐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멀리서 풍력발전기가 돌고 있었다.
옛날부터 순례자들이 그 물에 발을 씻으면 근육통이 사라진다는 맑은 샘물이 있는 산 볼 (San
Bol) 의 초입을 지나는데 허허벌판의 거대한 적막 속에서 지팡이 짚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조금 기다려 같이 걸으며 말을 붙여보니 폴란드 청년들이었다.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전공하는
음악생도들이었는데 한 학생이 자신의 아버지가 오페라 테너가수로 지금 한국 예술의 전당에서
오페라 투란도트를 공연하는 중이라며 귀에 익은 아리아를 잠깐 들려주었다. 피레네 산맥부터
야영을 하면서 왔다고 하는데 한국에 대한 동경이 대단한 청년들이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사방을 둘러보니 시커멓고 황량한 벌판이었다. 금방이라도 또 폭우가 쏟아 질 것 같은 흐린
날씨여서 학생들은 서둘러 야영지를 찾아야 하는 것 같았다.
문득 지평선도 안 보이는 이 시커먼 허허벌판에서 혼자 뒤쳐진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자
걸음이 더 빨라진 젊은 학생들과 필사적으로 보조를 맞추며 뛰다시피 걸었다.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얼마를 걸었을까? 몇 시간을 걸었는지, 가까운 듯 먼 듯한 곳에서 여섯 시를
알리는 성당 종소리가 들리며 마을 윤곽이 희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오늘의 종착지
온타나스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었다. ‘어떠한 고통도 결국은 끝은 있다’ 하는 안도감이 한숨을
돌리게 했다. 11km를 걸어 오는 동안 카페나 쉬는 공간도 없었고 한사람도볼수없었는데만약
혼자 길위에있었다면….상상도하기싫을정도로고통을겪었을것같았다.한눈에보아도작은
마을이라 알베르게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많은 배려를 해준 청년들에게 알베르게 앞 바에서
과일과 저녁을 사 주었다. 여기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공립 알베르게였다.
여자는 2층이라 올라가니 방 안은 젖은 옷들을 널어놓아 스팀에서 나오는 증기와 습기로
가득했다. 그래도 순례자들은 모두 말끔히 씻고 각자 침대에서 쉬고 있었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니 안 쪽에서 한 여자가 이곳의 물을 칭찬하며 자기 옆의 빈 침대를 가리켰다.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온타나스는 물이 유명하며 마을 이름인 온타나스도 ‘Fountain( 분수) ’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특히
하나밖에 없는 성당 분수대 물이좋다고한다.뜨겁고매끄러운물이10여시간걸어와지칠대로
지친 몸을 어느 정도 풀어 주었지만 아직도 허리가 욱신거리고 쑤셨다. 나는 빨래와 젖은 옷들을
먼저 도착한 사람들의 옷들로 빈 자리 없이 빽빽하게 뒤덮인 스팀 위를 조금 헤집고 걸쳐 놓았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모두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의 테레사, 캐나다의 마리아, 나 로사 셋이서
서로를 소개하며 알베르게에 딸린 부엌으로 내려갔다. 이탈리아인이라고 하는 한 남자가 자기
생일을 자축한다며 다른 순례자와 여기저기 찌그러진 큼지막한 양은 냄비에 가득히 스파게티를
만들어 놓고 축하파티를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음식과 와인을 권하여 조금 맛 본 스파게티
맛은 일품이었다. 힘든 일과를 마치고 집에서 식구가 모여 서로의 고생담을 이야기 하듯 대화가
한창인 그들을 뒤로하고 허리가 욱신거려 잠시 앉아 있다가 2층 침대로 올라왔다. 악명 높은
메세타 지역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