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3일
한국 학생들의 민속공연
POBLACION DE CAMPOS → CARRION DE LOS CONDES 16KM
순례자들이 모두 떠난 뒤 알베르게를 마지막으로 나와, 어제 간판을 보며 지나쳤던 바에 들어가
밀린 메모와 아침을 하며 늦장을 부렸다. 오늘은 저녁 8시 토요 미사가 있는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Carrion de los Condes) 의 성당에 가기 위해 33km를 걸을 계획이었던 구간을 변경하여
여기서 16km 거리에 있는 수녀님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에서 묵기로 하였다.
반드시 정해진 거리를 걸어야 할 의무감도 없는데 차질이 생긴 스케줄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마을마다 수호신같이 서 있는 순례자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특징이 없는 마을을 돌아본 다음,
아스팔트 도로와 나란히 가고 있는 끝도 보이지 않는 카미노로 나왔다. 어제 오후 파김치가 되어
걸었던 길. 1km 마다 표시를 해 놓은 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완주하려는 계획을 위협했던 허리 통증이 어느 정도 사라지니 몸도 마음도 한결 수월해졌는데
발에 새로운 물집이 등장하여 괴롭혔다. 계속 이어지는 자길길을 따라 어제 6km 정도를 덤으로
더 걸었던 마을을 지났다. 그리고 한 시간 반쯤을 더 걸어 비알까사르 데 시르가 (Villacazar de
Sirga) 로 들어섰다.
이 마을은 많은 기적을 일으킨 순백 마리아가 모셔져 있는 불랑카 성모 성당 (Iglesia de la Virgen
Blanca) 으로 유명하다. 순백 마리아는 국립 기념물이다. 템플 기사단이 만든 이 성당은 중세부터
순례자들에게 개방되었다는데 지금은 문이 닫혀 있었다. 잔을 앞에 놓고 성당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 있는 구리로 만든 순례자상이 특이했다. 오늘의 목적지가 6km 정도밖에 남지 않아 여유를
부렸다. 근처의 바에서 감자를 으깨어 치즈 등을 넣은 스페인식 오믈렛 또르띠야로 점심을 한 후
길을 나섰다. 목동들의 오두막집과 벽돌로 벽을 쌓고 목재로 발코니를 만든 예쁜 집들이 눈길을
끌었다. 굴을 파서 만든 포도 저장 동굴도 보였다.
마을을 벗어나 얼마 후 사람들 소리에 뒤돌아 보니 왠지 한국 학생들인 것 같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멀리서 오고 있었다. 어린 학생들로 보이는데 자기들 키 만한 배낭에 여기저기
도구들을 달고 다가왔다. 젊은 선생과 한 부부와 19명의 초. 중학생들이었다. ‘아! 어제 저녁
알베르게에서 순례자들이 카메라에 담은 학생들이구나’.
여행을 좋아하는 부부가 경험을 바탕으로 3년 전부터 학생들을 모집해 교육시키고, 1년에 한
차례씩 3년째 카미노를 걷는데 이 학생들은 7개월 전에 한국을 떠나, 유럽 몇 나라를 돌고
포르투갈, 프랑스를 거쳐 피레네 산맥을 넘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중간중간
알베르게에서 한국 민속춤과 노래 공연을 하면서 걸을 예정이라고 했다. 스페인 신문에도 몇 번
소개되었고 앞서 가는 교육으로 국위 선양하는데 공헌 한다며 30대 중반인 부인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학생 부모들은 외국 경험과 산지식이 우선이라며 학교를 1년간 쉬게 하며 기꺼이
수락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외국 사람들이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을 언급할 만도 하다.
인솔자들은 사전에 연락을 취하여 이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는 부엌이 딸린 알베르게에
묵으며 아이들에게 하루에 한 번씩은 한국 음식을 만들어 주고 체력 훈련과 학습 지도, 정신
교육을 시킨다고 한다. 이 기발한 착상을 현실화시킨 부부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었다.
어느덧 카미노의 심장이라 불리는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마을이 보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교차로에 서 있는 순례자상이 먼저 반긴다. 12개의 크고 작은 성당들이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던
마을이라 그런지 보이는 건축물들은 절대적인 종교의 힘을 느끼게 했다. 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밖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수녀님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며 농구대가 딸린 넓은 마당의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한국 학생들은 20여 개의 침대가 있는 1층 넓은 방으로 가고, 나는 따로 떨어진 건물 2층으로
올라가 넓은 방에 놓여 있는 20여 개의 매트리스 중 하나를 골라 잡았다. 먼저 도착한 테레사는
햇빛이 비치는 창가에 자리잡고 배낭정리에 한창이었다.
샤워를 한 후, 한가한 틈을 타 부지런히 밀린 빨래를 해서 스팀 위에 얹어 놓았다. 메모하기,
내일 걸을 길의 지도 보기, 마을 역사에 대한 자료 보기, 배낭 정리, 카메라와 전화 충전, 저녁 걱정
등 알베르게에 도착해서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오늘 저녁과 내일 지고 갈 간식과 물을 사기
위해 내 옆 침대에 자리를 잡은 덴마크 여자와 테레사와 함께 찾아간 슈퍼마켓에는 한국 단체
학생들과 처음 보는 네다섯 명의 한국 젊은이들을 포함해서 나까지 한국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천주교 신자인 덴마크 여자는 남편과 사별한 후로 걷는 것이 좋아 카미노를 걷기 시작했고
이번이 여섯 번째인데 두 번은 끝까지 걸었고 네 번은 지금처럼 1년에 반씩 나누어서 걷는다고
했다.
저녁 8시에 미사가 있는 산타 마리아 성당을 미리 돌아보았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로
현관에는 ‘동방박사의 경배’ 조각과 이슬람교도에 희생된 처녀 100명의 전설에 관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저녁 7시쯤 알베르게 마당 테이블에서 테레사, 덴마크 여자와 저녁으로
샌드위치를 먹고 앉아 있는데 밝고 건강하게 보이는 한국 학생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짚신
모양의 신발을 신고 방에서 나왔다. 태극기를 선두로 한국 전통 의상을 입고 장구와 북을
두드리며 알베르게 마당을 한바탕 돌고 가는 학생들 뒤를 따라 산타 마리아 성당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감격스런 미사를 드리고 성체를 모신 다음, 순례자들에게 주시는 신부님의 강복을
받으며 감사 기도를 드렸다. 미사가 끝난 다음에 특이한 복장의 한국 학생들을 보신 신부님은
통역할 사람을 찾아 공연을 부탁하셨다. 20여 명만이 남은 성당 제대 앞에서 학생들은 모두 10여
곡의 스페인 노래, 팝송, 한국 노래 등을 30여 분쯤 부른 다음성당이떠나갈듯이장구와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치고 두드렸다. 총 한 시간 십 분 정도의 공연이 끝난 후모자를성당복도가운데
놓고 인디안 학교 학생들을 위한 모금을 했다. 공연 중간에 자리를 뜨시는 신부님에 이어
알베르게에서 만나자고 일어나는 테레사와 따라 나가는 덴마크 여자를 보니 왠지 민망해지며
성당 안에서는 노래만 했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모자라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이런 경우에 잘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20유로를 모자에 넣고 성당을 나왔다.
성당 밖으로 나오니 별안간 한겨울의 쌀쌀한 날씨로 변해 있었다.
2012년 10월 14일
추위와 외로움과 배고픔이란
CARRION DE LOS CONDES → CALZADILLA DE LA CUEZA 17KM
항상 긴장을 해서 그런지 일어나면 신기할 정도로 거의 6시다. 어제 정리한 배낭과 배낭 위에
걸쳐 놓은 옷가지와 신발을 들고 조심스럽게 방을 나왔다. 방 밖으로 난 화장실에서 매일 아침과
마찬가지로 양치질과 대충 씻은 얼굴에 썬 불락 크림만 바른 다음 썰렁한 일층 부엌으로
내려왔다. 아침으로 도넛과 우유를 마시며 주위를 훑어보니 부엌 한쪽 벽 전체에 순례자를
묘사한 색 바랜 그림이 차지하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한발 한발 옮기기가 힘든 듯한 순례자의
지친 모습의 그림을 바라보며 오늘 아침은 유난히 외롭고 춥고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는 7시에도 컴컴하고 카미노 표시가 헛갈리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 혼자서 마을을
빠져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30분쯤을 기다리니 덴마크 여자도 나오고 몇 명의 순례자들이
피곤한 기색으로 나왔다. 알베르게 문을 열고 나오기가 무섭게 밀려오는 바람이 매섭게
차가웠다.
오늘의 목적지는 18km 거리인 칼자리야 데 라쿠에자 (Calzadilla de la Cueza) 인데 지나가는 길에
마을도 카페도 아무것도 없어 메세타 지역에서도 제일 가혹한 길이라는 곳이었다. 간식인
초콜릿과 물병만을 더 넣었는데도 가방 무게가 다시 무겁게 느껴지고 허리가 아팠다. 잠바에
붙은 모자를 뒤집어써서 얼굴 윤곽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따라 컴컴한 길로 나왔다. 얼마나
빨리 걷는지 한 10분쯤 지나자 덴마크 여자는 더 이상못따라가겠다며알베르게로다시돌아가
날이 밝을 때 나오자고 했다. 나는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며 기를 쓰고 따라 갔다. 마을을
벗어나도 계속 컴컴한 흙길로 이어졌다. 앞서가는사람들을놓칠까봐죽을힘을다해한시간쯤
따라가니 날이 밝으면서 길이 희끄무레하게 보이며 다른 순례자들의 웅크리고 걷는 모습들이
밀밭 사이 양쪽으로 보였다. 허리, 다리, 팔, 발가락들이 내 몸에 붙어 있나 싶다. ‘이 시간도
지나가리라.’
이 길은 정말 메세타 지역에서도 악명 높은 지역이었다.
그저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 양쪽 밀밭에서 거칠 것 없는 바람소리가 쌔앵쌩 귀를
때렸다. 그 바람이 어찌나 차고 매서운지 잠바 소매 끝으로 싸서 판초비옷 속으로 넣은 손이 얼
지경이었다. 강하고 독한 바람과 매서운 추위였다. 얼굴을 온통 감싼 순례자들이 옆도 뒤도
안보고 눈길도 안주며 웅크린 채로 스쳐 지나갔다. 100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이
힘든 길을 걸었을까. 옛날에는 달려드는 짐승들과 싸우고 병마에 시달리며 쉴 곳도 없이
배고픔에 지쳐 살아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례자들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문명 이전 혹독한
기후에도 살아남은 우리 조상들의 힘들었을 삶이 몸으로 느껴졌다.
한 남자가 손에 양말을 끼고 지나갔다. 나도 따라 두꺼운 양말로 두 손을 감쌌다. 18km를 한
번도 쉬지 못하고 이 추위에 강행군을하며걷고있는오늘은작년피레네산맥을넘을때와는또
다른 고통이며 힘겨운 시간이었다. 죽기 살기로 걸어 세 시쯤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삶과 죽음은 멀고도 가까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은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를
찍어주며 이렇게 무섭게 바람이 불고 추웠던 날씨가 근래에는 없었다고 했다.
열악한 방으로 들어가니 미리 도착한 순례자들이 침낭으로 들어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꼼짝도
않고 누워 있었다. 문 옆에 있는 아래층 침대에 배낭을 내려놓으니 춥고 외롭고 아픔과 배고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이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표현할 방법은 눈물인 것 같았다. 어제 걸었다면.
아니 내일 걸었다면. 돌아갈 집이 없다면….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 에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라는 구절이 생각이 났다. 운명과 인연은 어떤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리기도 하는 것이리라. 남편의 전화가 기다려졌다. 지금 이 순간은 먼저
아프다고 호소하는 것 보다 보호를 받고 있다는 마음의 위안이 더 필요한 순간이었다.
순서를 기다려 끊어질 듯 말 듯한 더운물로 간신히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담요 세 장을 덮고 웅크리고 30분쯤 누워 있으니 테레사, 멕시코 모녀, 덴마크
여자 줄줄이 기진맥진하여 들어섰다. 정말 반가웠다. 바로 뒤따라 남자 순례자들, 그 중에서도
피레네서부터 매일 40~50km를 걸었다는 체구가 건장한 독일 사람이 비어 있는 내 침대 위층으로
올라가 그냥 쓰러져 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매트리스가 내려와 앉아 있는 내 머리 위를
스쳤다. 기다리던 남편의 목소리에 뒤이어 다정한 교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미노에서
누구나 느끼는 가족의 사랑과 친구들의 소중함이 오늘따라 절실하게 느껴졌다.
저녁 7시쯤 되니 침대 24개가 다 찼다.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테레사, 마리아, 멕시코 모녀와
10분 정도 걸어 식당으로 가는 길은 조금 전의 강추위와 바람은 온데간데없고 조금 쌀쌀하기만
했다. 8시에 문을 여는 북적거리는 식당에서 어떠한 힘겨운 상황도 즐거운 추억으로
만들어버리는 카미노 여인들과 함께 따뜻한 수프를 곁들인 메뉴 델 디아와 와인으로 어느 정도
피로가 풀렸다.
밤 10시가다되어돌아오니불이꺼진방에서여러순례자들이자고있었다.강약으로코고는
소리들, 녹이 슨 스팀에서 나오는 칙칙거리는 소리와 함께 각자의 앓는 소리들, 이 모든
혼성곡들을 못 견디겠다는 한숨 소리와 뒤척거리는 소리들이 서로 화답하듯 주고받고 있었다.
20여 명의 완전 불협화음 알베르게 악단이었다. 쾌쾌한 냄새와 함께 이 밤을 어떻게 지내나….
어두운 데서 누군가 자기 침대로 더듬더듬 찾아가다 배낭에 걸려 넘어지며 지르는 비명소리는
연주에 흥을 한층 더해주는 것 같았다. 살아 있음에, 돌아갈 안식처가 있음에 감사를 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