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5일
길에 서면 외롭지 않다
CALZADILLA DE LA CUEZA → LEDIGOSSAHAGUN 24KM
여기저기서 부스럭거렸다. 또 다른 새로운 아침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체구와 어울리게 유난히 코를 골았던 위 침대의 독일 남자는 벌써 떠날 준비를
하다가 나를 보더니 “굿 모닝”하고 인사를 했다. 나는 웃으며 ‘굿 모닝’이 아니라 했더니 자기도
자기 죄를 아는지 웃어 버렸다. 갈라진 오른쪽 발가락들을 밴드로 완전 봉쇄하고 버스로
목적지인 레온까지 가겠다는 테레사와 마지막 서운한 이별을 진한 포옹으로 대신하며 이 메일
주소를 주고 받았다.
지독한 워밍업을 하고 난듯한몸과마음은또다시맑고예쁜아침햇살에이른봄새싹이나듯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밭두렁에 아무렇게나 자란 조그마한 노란 쐐기풀도 햇살에 예쁜 꽃으로
보였다. 바람결에 실려 오는 거름냄새도 역겹지 않고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이곳의
날씨처럼 변화무쌍한 몸과 마음은 어쩌면 이렇게 간사하게 적응을 잘할까? 모두들 걸음도
씩씩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오늘 목적지는 레디고스 (Ledigos) 를 거쳐 사하군 (Sahagun) 이었다. 오늘 하루는 어떤 길이
펼쳐지며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마음이 설렜다. 알베르게를 같이 떠난 순례자들이 각자의 보조에
따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의 그림자를 밟고 걸었다. 다시 오르막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는
나에게 벌써 산등성이 고개 위에 올라가 손을 흔들며 먼저 가겠다는 신호를 보내는 젊은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카미노를 걷기 위해 근 3개월 동안 자는 시간과 컴퓨터에 앉아 있는
시간외에는 서서 생활을 하며 지구력을 길렀다. 그러나 ‘나이는 어쩔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디고스를 지나 붉은색 벽돌로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을 거쳐 다시
광활하게 펼쳐진 밀밭길을 걸어갔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세 시간쯤 지나자 다시 허리, 발가락,
무릎이 모두 아픈데 제일 심한 것은 발가락 통증이었다. 몸도 마음도 가장 강한 고통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오후 1시 30분쯤 모라티노스 (Moratinos) 산등성이 언덕 위에 덩그러니 홀로 있는 모텔 바에
들어갔다. 주인이 독일 여자였다. 한글로 쓴 엽서들이 입구 창가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었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앉아 있으니 한국 아가씨들 셋이 들어왔다. 각자 서울, 구리, 인천에 사는데
직장에 사표를 내고 순례길의 출발지인 피레네 산맥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번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다가 어느 알베르게에서 다시 만나 여기까지 같이 왔다고 했다. 오늘도
목적지는 각자 다르다고. 20대로 보이는 30대 아가씨들. 밝고 활기차고 자신이 넘치는
얼굴들이었다. 한국의 경제 성장이 외국을 여행하는 젊은이들에게도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
같았다. 또한 젊은 사람들의 정리된 논리, 분명한 목적의식과 무엇이든 혼자서 할 수 있다는
뚜렷한 의지가 보였다. 한국의 카미노 신드롬에 자기들도 놀랐다는 생각들을 이야기하는데 서로
비슷한 견해들이었다. 같이 떠나자는 그들에게 어차피 5분 후면 뒤쳐진다는 말을 남기고, 이제는
감각이 둔해져 거의 신체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배낭을 메고 나왔다.
혼자 다녀도 길에서는 그다지 외롭지도 무섭지도 않다. 자연과 더불어 걷는다는 행복감도 있고
가끔 가다 만나는 사람들과 부담 없이대화도할수있고빨리걷는사람을부지런히따라갈일도
없다. 숙소에 들어가면 잊어버리게 되는 메모도 그때그때 할 수 있어서 좋고, 나름대로 구도를
잡아가며 열심히 이것저것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 좋다. 또 길을 따라 있는 수많은 유적지도
가능한 한 여유 있게 살펴 볼 수도 있어 좋고, 많은 것을 생각하며 느끼며충분히내것으로만들
수 있어 좋다. 지금은 내 눈앞에 넓은 해바라기밭이 펼쳐진다. 큼지막한 노란 꽃들이 들판에
출렁거리는 여름 카미노를 맘껏 상상하면서 왜 상점에 해바라기씨가 그렇게 많이 진열돼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걸을 수 있어 좋다.
걷다 보니 팔렌시아 (Palencia) 지방의 표지석이 보였다. 부르고스에서 팔렌시아 지방으로 가다
만나는 이곳은 과거 카스티야 왕국과 레온 왕국의 경계지점이었다.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오늘 목적지인 사하군 마을까지 8km 남았다는 사인을 지났다. 계속 경사가 심한
산길을 걷다가 평평한 길로 내려오니 오후 4시 30분쯤 되었다. 레온 주가 시작되는 사하군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13세기에 지어진 돌다리를 지나 문이 닫혀있는
푸엔테 (Puente) 성모 성당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당 앞에서 처음으로 일본 여자를 만났다. 영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가 코닥
회사에서 10년째 근무하며 매년 일주일에서 이주일정도 유럽 문화 여행을 한다고 했다. 영국
발음의 영어가 유창했다. 앞에 사하군 시내로 들어가는 아스팔트길은 수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길을 피해 짧은 길로 간다고 논둑을 가로 질러 얕게 보이는 냇물을 건너다가 서로가
엉켜 넘어져 흙탕물을 온몸에 뒤집어썼다. 어제는 한겨울이었는데 지금은 봄 날씨 같아
천만다행이었다. 물이 뚝뚝 흐르는 옷을 대충 짜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호텔로 들어갔다. 제법 큰
호텔인데 독방이 25유로라 가격은 비싸지 않았다. 오늘은 어쩔 수 없었지만, 나는 이 여행기간
동안 가능하면 알베르게에서 묵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우선 힘들게 순례의 길을 걸으며
호텔에 드는 것은 어울리지도 않으며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이른 아침에 혼자서 제
길을 찾아 마을을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아서였다.
각자 방을배정받고호텔방에들어오자그동안샤워할때뿐아니라자나깨나목에걸고다니는
유로와 여권이 든 꾀죄죄한 복대를 아무렇게나 침대에 내던지는 여유도 부려보았다. 미지근한
물이라도 끊어질까 봐 조바심내지 않아도 되는 오늘 저녁, 뜨거운 물로 맘껏 피로를 풀었다.
빨래한 옷들을 여기저기 널고 걸쳐놔서 어수선한 방을 나와 호텔 1층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몇
가지 빨래도 프런트 데스크에 맡기며 고급 여행을 하는 미시코와 촛불까지 켜놓은 넓고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의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호사스러운 저녁 식사를 하였다.
카미노에서 또 다른 추억으로 반나절 인연이 된 미시코는 레온까지 택시로 간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 안전한 여행을 바란다며 복도를 사이로 마주 하고 있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은
전화위복 같이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에 밤 10시가 넘어서도 환하게 불을 켜고, 남은 구간을
다시 조정하며 늦도록 여유를 부렸다. 하루하루 다양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카미노였다.
2012년 10월 16일
상쾌한 기분으로 길을 나서며
SAHAGUN → EL BURGO RANERO 23KM
호텔 뷔페에서 점심을 걸러도 될 만큼 든든히 먹고 스팀으로 보송보송 하게 말린 옷을 입으니
몸이 날아갈 것 같았다. 매일 습관이 되어 혹시 놓고 나오는 물건이 없나 돌아보고 확인하며
9시쯤 호텔을 나왔다. 배낭의 무게도 별로 안 느껴지고 몸도 마음도 홀가분하여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이었다.
16세기에 지어진 삼위 일체 성당 (Iglesia de la Trinidad) 을 지났다. 지금은 알베르게로 사용하고
있는데 순례자들이 모두 출발을 끝낸 시간이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사하군 안내판을 들고
있는 순례자 조각상만이 덩그러니 수문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17세기
사하군 (Sahagun) 수도원에서 만든 산 베니토 아치 (Arco de San Benito) 를 통과했다. 중세에 석재와
목재가 부족하여 주로 흙 벽돌로 수도원을 지었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북쪽으로 갈수록 흙갈색의
건물들이 많이 보였다. 이곳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이슬람 문화와 가톨릭 문화가 융합된 스페인
특유의 무하데르 양식으로 지어졌다. 매주 토요일 장이 서는 마을답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인구 3,000명이라는 사하군 마을은 스페인 수도원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마을이다.
수도원은 동전을 주조했을 만큼 부유했다고 한다. 특히 15~16세기에 프랑스 수도사들이
순례자를 위해 식량을 공급하며 전성기를 누렸던 마을로 지금도 어느 수도원에서는 순례자들을
치료해 주고 있다.
중세의 시간에서 멈추어 서서 성장이 끝난 것 같은 마을을 지나 깐또 (Puente de Canto) 라는
이름의 다리를 건너 도로 옆으로 난 흙길로 들어섰다. 길이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있어
끝자락처럼 보이는 길이 끝나면 또 다시 시작되는 흙길. 끝에 다다른 것 같으면 어김없이 다시
시작되는 길이었다. 그림자를 벗 삼아 한 시간 반쯤 걸어 드넓은 해바라기밭 앞에 칼자다 델
코토 (Calzada del Coto) 이름을 표시한 마을로 들어섰다. 여기서 로마 루트와 프란세스 두 갈래
길로 갈라지는데 좀 더 짧다는 프란세스 길을 택했다. 작년과는 달리 북으로 갈수록 인심이
후하지 않아 바의 화장실을 쓰고 오렌지를 사서 나오는데 길을 묻는 두 폴란드 아가씨와 만났다.
가는 길을 다시 확인하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그녀들과 뻥 뚫린 황야로 나왔다.
이 폴란드 아가씨들은 23살로 8월 초에 집을 떠나 이탈리아를 거쳐 2000km를 걸어
산티아고까지 갈 계획이라고 했다. 거의 돈을 안 쓰는 무전 여행으로 숙식도 성당 아니면
그때그때 공짜로 잠을 잘 수 있는 곳에서 자고 알베르게나 바에서 하루 이틀씩 아르바이트 하며
비용을 충당한다는 대단한 아가씨들이었다. 2년 후에 아시아를 여행할 예정이라며 먼저 이 메일
주소를 줄 수 있느냐는 그녀들은 한국 라면을 즐겨 먹으며, 한국 사람들의 이 메일 주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이 많은 외국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6.25 전쟁 후의 가난한 나라라는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 폴란드 여성들을 비롯한 외국 젊은이들은 한국의 요즘 인기 연예인들의
모습과 한국의 수준 높은 상품이나 물품으로 문화와 경제의 수준 또한 많이 부상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외국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유지하기 위한 어떤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흙길과 군데군데 마른버짐 같이 나 있는 풀길을 젊은
아가씨들과 한 시간 이상 보조를 맞추며 걸으니 체력에 무리가 온 것 같아 그녀들을 먼저 보냈다.
다시 맑은 하늘과 흘러가는 구름과 오후가 되어 길게 늘어진 내 그림자만이 남아 있었다.
양떼들이 모여 있는 목장, 소 몇 마리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는 밀밭과 해바라기밭을 지났다.
체중이 조금 줄어 흘러내려간 바지를 추스르며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유럽에서 가장
넓은 국토를 보유하고 있고 제일의 농업국인 스페인의 북부 지방 밀 경작지는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작년에도 끝도 없는 포도밭을 지나며 느꼈듯이, 가끔 보이는 트렉터와 문명의 최신
기계로 아무리 갈고 가꾸고 수확한다 해도 사람의 손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텐데 노인들만
보이는 시골 마을에서 어떻게 수확을 할까 걱정도 아닌 걱정을 하면서 걸었다.
오늘의 목적지 엘 부르고 레네로 (El Burgo Ranero) 는 피레네~산티아고까지 딱 절반이 되는
마을이다. 일곱 시간 정도를 걸어 카미노를 벗어나 목적지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느닷없이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알베르게 사인을 보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두 순례자가 날쌔게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 여기는 문을 연 알베르게가 하나밖에 없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나도
부지런히 그들을 따라갔다. 북쪽으로 갈수록 다른 순례자들도 점점 지쳐가는지 양보와 배려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알베르게에는 2층에 침대가 두 개 남았고 다행히 그 중 한 개 남은 아래층
침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한 멕시코 모녀와 레베카와 낯이 익은 몇 사람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매일 도착해서 해야 하는 일들을 이제는 세련되게 순서대로 처리하고 비가 그친 썰렁한 동네와
굳게 닫힌 성당을 돌아본 후 알베르게 앞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 테이블에서 여러
순례자들이 권하는 자리를 앉았는데,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서 왔다는 은퇴한 은행원 짐 마틴을
만났다. 미국 사람들도 샬롯이라는 도시가 어디 있는 줄 잘 모르는데 순례길에서 같은
고향사람을 만나니 “It’s a small world”라며 서로 반가워했다. 그는 사진사를 대동하고 공적인
임무로 온 사람 같은데 레온까지만 걷는다고 했다. 화장실이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1층에
있어 오늘은 와인과 음료수를 삼가고 먼저 일어나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 각자 요리한 음식들을 먹는 테이블 한 구석에서 자세도 얌전히 무엇을
쓰고 있는 한국 아가씨가 보였다. 이름은 헬레나, 어려서부터 수녀가 되고 싶어
생장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 800km를 걷고 다시 역으로 부르고스까지 가는 27살의 부산
아가씨였다. 오늘이 40일 째인데 수녀의 길을 가기로 거의 결심했지만 내년에 다시 한 번 순례의
길을 걸으며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이라고 했다. 봉사를 하면서 카미노를 걷고 있는 캐나다 여자가
나누어준 팥죽 비슷한 빠야자를 후식으로 먹으며 헬레나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밤중에 화장실을 가게 되면 컴컴한 1층 가파른 계단을 내려와야 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22개에서 끝나는 나무 계단을 세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혹시 잊어버릴지 몰라 손바닥에 이십이
라는 숫자를 적어 놓았다. 오늘은 잠자리가 2층 방이라도 아래 침대임에 감사를 하며 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