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19일
고즈넉한 들판의 평화로움
LEON → SAN MIGUEL DEL CAMINO 15KM
맑은 레온의 아침이었다. 아직도 감기 기운이 있지만 새로 산 두툼한 잠바와 털모자를 쓰니
레온에서 순례를 시작하는 것 같은 새로운 기분이 되었다. 러시아 청년한테 고맙다는 인사도 할
겸, 커피를 마시러 어제 들렸던 카페로 갔더니 문이 닫혀 있었다. 오늘은 오전 시간 중에 시내를
비롯해서 세비야의 대주교였고 스페인의 천주교를 통합한 성인 이시드로의 성당과 미술관,
자세히 돌아보지 못했던 가우디의 건물 등을 둘러 볼 예정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레온 성당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중앙 광장에 있는 카페로 가는 아침의 거리는
한산하였다.
광장 앞 카페에서 카페 콘 레체를 마시고 있는 프랑스 여인 브르짓드를 우연히 만났다. 어제
저녁 바르셀로나에 사는 딸과 헤어지고 레온에서 순례의 길을 마친 그녀는 멋있는 코트와
스카프로 산뜻한 차림이었다. 그녀도 새로 산 내 검은색 잠바와 빨간 털모자가 어울린다며 “New
fashion”하면서 반가워하였다. 생각하니 이번이 세 번째 만남이고 그것도 잠깐인데, 오래된 친구
사이 같은 친근감은 아마 이역만리에서 외롭기도 하고 또 서로가 어딘지 맞는 느낌이 있어서인
것 같았다. 우리는 카페를 나와 복잡한 시내를 돌아 중세기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구 시가지의
중심부를 돌아보았다. 두 시간쯤 지나니 카미노를 다시 걷고 싶은 생각이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몸과 마음을 동시에 끌어당겼다. 복잡한 찻길을 어서 빨리 벗어나고도 싶었다. 오전
중의 나머지 계획들은 후에 남편과 함께 와서 관광하기로 하고 순례의 여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노르망디의 박물관에 근무한다는 브르짓드는 내일 오후 레온을 떠나 프랑스로 돌아간다고
하며 남은 시간을 성당 내의 그림 등을 감상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산 마르코 광장에서 이 메일
주소를 주고받으며 한두 마디만 하면 느낌이 통하는 다정다감한 그녀와 이별의 긴 포옹을 하며
헤어졌다.
12시쯤 노란 화살표를 따라 산 마르코 돌다리를 건너 레온시를 부지런히 벗어났다. 편안하고
고즈넉한 들판과 산속길로 접어드니 마음이 더없이 평화로웠다. 바람에 흔들려 이리저리 명암을
드리우는 나무들 사이의 산길에서 고독의 상징 같았던 내 그림자로 동양화도 그려보았다. 이젠
모든 것에 익숙해져서 발을 땅에 올려놓기만 하면 저절로 가고 있는 내 존재를 확인하며 1000여
년 동안 수많은 순례자들이 걸었던 이 카미노를 걷고 있는 행복한 이순간숨을쉬며살아있음에
감사했다.
햇볕이 따스하게 비추는 고요한 산길에서 오래간만에 따각따각 4박자가 정확하게 맞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왔다. “Korean singer is coming” 하며 두 아가씨가 서로 웃으며 지나갔다. 그
뒤로 50대 초반인 듯한 한국 남자가 배낭 없이 빈 몸으로 정말 노래를 하며 오고 있었다. 다니던
회사를 해고되기 전에 스스로 퇴직했다는 그는 카미노를 걸으며 남은 인생을 설계 하라는 부인의
말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다고 코믹하게 이야기 했다. 그리고 “부엔 카미노”를 외치며 앞서 가더니
흥얼거림을 시작으로 커다랗게 노래를 하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에서 그의 부인의 모습이 잠깐
어른거렸다.
그동안 알베르게마다 꼬리표를 붙인 배낭이 일렬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광경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순례자들 중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배낭을 먼저 택시로 보내거나 우체국에서 다음 묵을
숙소로 부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빈 몸으로 걸었다. 나는 확인하듯 흘러 내린
배낭을 다시 한 번 추스렸다. 나는 이 무거운 배낭이 내 몸의 일부인 듯등에붙어있어야안심이
되었다. 내 등에 단단히 붙어 있는배낭이힘들고외로운이길에서언제나나와함께하는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있었다. 처음보다 무게도 많이 가볍게 느껴졌다. 긴 인생길을 가고 있는 우리 등의
십자가가 지금 내가 지고 있는 배낭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넉넉한 마음으로 들판을 바라보았다. 희망찬 봄을 알리는 듯한 새소리와 노랑, 보라, 빨강
야생화가 듬성듬성 피어있는 산속길을 지나고 온통 양쪽에 옥수수로 가득한 밭 사잇길도 지났다.
날마다 알베르게를 도착할 즈음이면 온몸이 파김치가 되어 멀리서 까마득하게 보였던 마을이
오늘은 바로 앞에 있는 마을로 보였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마을인 San Miguel del Camino
사인이 보였다. 허수아비로 갸우뚱하게 만들어 놓은 나무판자에 하얀 페인트로 쓰여진 마을
이름이 중간중간 벗겨져 짐작으로만 알 수 있는 사인이었다.
이 마을은 알베르게가 세 곳이나 있는데 첫 번째 나타나는 알베르게로 들어가 방안의 모습들이
한눈에 보이는 확 트인 넓은 방에 배낭을 풀었다. 알베르게에 달린 식당으로 내려가니 식사를
하고 있던 순례자들이 한자리를 비워줬다. 레온에서 시작했다는 핀란드자매, 은퇴를 하고 간간이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는 호주부부, 스위스 부부, 봉사하며 다니는 캐나다 여인, 독일인 부부,
프랑스 남자, 아일랜드에서 온 사람 등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훈훈한 식사 도중 프랑스
남자가 남은 수프를 그릇에 담아 내 앞에 내밀며 “미스 레온” 이라 부르며 크게 웃었다. ‘아, 그
사람이구나’.
레온으로 오는 도중에 찻길에서 빗줄기가 갑자기 굵은 빗발로 변해 너무 무서워 차도에서
‘레온’만을 외치는 나를 인도로 데리고 나와 가는 방향을 알려준 그 사람이었다. 내 모습을
상상하니 창피스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지만 서로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국적을 초월한
즐겁고 화기애애한 식사 시간이었다.
저녁 값으로 9유로를 받아 미안한 듯이 주인은 식당에 딸린 부엌에서 방금 요리한 우리나라
해물잡탕 볶은 밥 같은 빠에야와 수프, 야채 샐러드, 여러 가지 빵을 부지런히 내놓았다.
오래간만에 다양한 후식도 즐길 수 있었던 저녁이었다. 타고난 선량한 품성의 이 주인
아저씨에게 좋은 일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캐나다 여인과 함께 테이블과 그릇을 정리해
주었다. 따뜻한 음식과 푸근한 정으로 며칠 따라다니던 감기가 떨어져 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오늘 밤 잠자리는 편안할 것 같았다.
2012년 10월 20일
한국 사람들의 카미노 신드롬
SAN MIGUEL DEL CAMINO → SANTIBANEZ DE VALDELGLESIAS 25KM
주인이 성실하게 차린 뷔페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독일인 부부와 알베르게를 나왔다. 오늘의
목표는 31.1km. 주교좌 성당이 있는 역사적인 도시 아스토르가 (Astorga) 로 향하는 날이었다.
걷기에는 너무나 좋은 날씨였다. 몇몇 순례자들은 가벼운 복장으로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따각따각 지팡이 소리들이 아침의 정적 속에서 거의 사라진 후 양쪽 겨드랑이에 나무 지팡이를
끼고 가는 독일 여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그녀의 남편은 계속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거의 같은 간격으로 얼마쯤을 걷다가 그녀는 내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독일의 휴가기간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보다 길어 휴가기간 동안 카미노를 걸을 수 있다고 하며 카미노는
유럽문화권이라 유럽인이 많은 건 당연한데 먼 동양의 한국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이유가
궁금하다고 진지하게 물었다. 버스로 단체 순례 여행하는 한국의 여러 부부들도 알베르게에서
만났다고 했다. 가끔 카페나 알베르게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던지는 공통 질문이었다.
비수기인데도 작년보다 훨씬 많아진 한국인들의 모습과 느낌, 여러 장소에서 다녀간 흔적 등이
이를 증명해 주었다. 나 또한 길에서도 알베르게에서도 한국 사람들을 자주 만날 뿐 아니라 여러
장소에서 다녀간 흔적을 보면서 비수기인데도 작년보다 한국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다고
느꼈었다. 나는 가끔 한국 젊은 사람들과 함께 걸으며 나눈 대화와 나름대로 정리한 생각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프랑스인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나는 걷는다’ 등의
책과 한국 사람들이 카미노를 걷고 쓴 책들이 한국인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고, TV 다큐멘터리와
많은 신앙인들의 참여, 그리고 경제적인 발전과 더불어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의
꿈이 있는 삶 등을 나름대로 답변해 주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그녀는 한국의 많은
제품이 독일 제품을 앞서가는 수준이라며 한국인의 근면성과 성실성을 칭찬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얼마쯤을 걸었는지 어느덧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Hospital de Orbigo) 에
도달했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카미노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다리가 있었다. 3세기 로마
시대에 건축되었고 13세기에 증축된 유명한 다리로 20개의 아치가 지금도 아름다웠다. 전투에
대한 전설이 있는 오르비고 다리에서는 매년 6월 검투사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돌다리를 건너 성
요한 기사단의 영지였던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 마을로 들어섰다. 생기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성 요한 기사단은 몰타 기사단이라고도 한다. 지금도 세계에서
의료 봉사 활동을 하고 있고 유엔 총회에도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약 30여 명의 신부와 3000명 정도의 기사들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도 그들이 관리하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 (San Juan Bautista) 성당을 잠시 둘러보았다.
오르비고 마을을 벗어나니 두 갈래 길인 아스팔트의 짧은 도로와 산길이 나왔다. 나는 산길을
택했다. 무심코 선택한 아주 작은 결정이 인생에 가치 있는 삶으로 이어지기도 하겠고
후회스러운 일을 남길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며 들판의 옥수수밭이 끝나고 조그맣게 자리
잡은 마을을 지났다. 다시 숲으로 난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20분 정도
바에서 지체했을 뿐인데 앞 뒤로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불현듯 생각하니 곳곳에서 자주
나타나는 노란 화살표를 못 본 것 같았다. 산길을 올라오며 몇 군데 갈림길이있었는데어디서
지나쳤을까 불안한 생각에 온몸에 땀이 범벅이 되도록 기를 쓰고 언덕길을 올라갔다. 멀리서
아스팔트길이 보이고 자전거 순례자들이 입은 색색의 옷들이 보였다. 뒤를 돌아보니 두 아가씨가
숨을 헐떡이며 올라오고 있었다. 제대로 왔구나.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다시 가벼운 마음이 되어 산티바네즈 데 발데이글레시아스 (Sant ibanez de Valdeiglesias) 라는
아주 초라한 마을로 들어서서 길가에 있는 알베르게 문앞을 지났다. 여기서 12km 떨어져 있는
아스토르가를 향하여 숲길로 들어섰다. 부지런히 걸어 30분쯤 지났는데 빗방울이 떨어지며 숲
속길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적지 아스토르가로 향하는 시간이 조금 늦은 감이 있어
망설였는데 잘됐다 싶어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배낭 밑바닥에 있는 비옷이 꺼내기 불편해
잠바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서둘러 지나쳐온 마을로 다시 돌아가 하나밖에 없다는 허름한
이층 건물의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나는 이날부터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산골 아니면 시골 알베르게에 묵게
되었다. 크고 작은 도시로 연결되어 일반 순례자들이 많이 묵고 시설이 괜찮은 도시의
알베르게가 아니었다. 허름한 알베르게로 들어가 무뚝뚝한 주인에게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를
받으며 저녁 값을 동시에 지불하였다. 협소하고 작은 식탁이 놓인 부엌에 들어가니 향수 어린
냄새가 진동을 했다. 먼저 도착한 한국 모녀가 닭죽을 만들어서 먹고 방금 끝난 것 같았다. 나는
지금까지 한국 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었다. 그동안 포기했던 우리 음식 냄새를 맡으니 춥기도
하고 아침 후로 점심에 시금치나 근대국 같은 수프 이외엔 아무것도 먹은 것이 없어 배도 몹시
고팠지만, 회가 동 한다는 말이 이럴 때 쓰이는 말이었는지….
큰 마을이나 도시에는 보통 공립 알베르게에 반드시 취사 도구가 있는 부엌이 딸려있어 일부
순례자들이 슈퍼에서 장을 봐서 음식을 해 먹는다. 하지만 나는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파김치가
되어 귀찮기도 하고 번거로워서 사먹기로 하였다. 스페인 음식이 내 입맛에 어느 정도 맞기도
했다.
이 마을은 슈퍼가 없어 200여 명의 주민들도 다른 마을에서 생필품을 구입해서 저장해 놓고
쓰는 곳이었다. 핀란드 자매와 나는 저녁 값으로 8유로나 주었는데 주인은 부엌에 딸린 조그만
광에서 생 파스타 봉지와 바게트 빵을 몇 조각씩 썰어주고 물컹물컹한 연시 같은 토마토
하나씩을 내놓더니 광문을 자물쇠로 잠가 버렸다. 그리고 알아듣거나 말거나 스페인 말로 뭐라고
하더니 우리보고 해먹으라는 소리인지 그냥 나가 버렸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다시 나타난 고약한
주인은 6시쯤 우리를 부엌에서 내쫓고 부엌문을 잠가버렸다. 작은 난로와 테이블만 덩그러니
놓인 사무실에 짧은 나무 세 토막만 물통에 놓고 사라졌다. 주인집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한국 모녀, 핀란드 자매, 이탈리아 여자, 나 여섯 명은 난로 앞에서 오돌오돌 떨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한방에 열 개의 침대가 있는 한기가 서린 방에서 옷들을 다 입은 채로 각자 담요들을
뒤집어 쓰고 소리 없이 누웠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심하고 가뜩이나 밖에는 계속 비도 내려서
내가 느끼는 기온은 엄동설한 같은 날씨였다. 비까지 맞았던 온몸이 말할 수 없이 춥고 등이
떨렸다. 한 침대에서 꼭 껴안고 잠을 청하는 한국 모녀는 서울 화곡동에서 8월 중순에 인천공항을
떠나 카미노를 걷고 바르셀로나를 거쳐 11월 말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힘든 상황이 지나면 해가 뜨는 밝은 아침이 오고, 잠깐 충만하고 행복한 순간이 지나면, 고달픈
행로가 펼쳐지는 카미노. 오늘 밤도 잊지 못할 또 다른 카미노의 추억이 될 것이다.
2012년 10월 21일
주교좌 성당에서 정오 미사
SANTIBANEZ DE VALDEIGLESIAS → SANTA CATALINA DE SOMOZA 22KM
이젠 면역이 됐다고 생각한 몸이 어젯밤의 비와 추위로 다시 으스스했다. 불이 희미하게 켜진
카페에서 여러 잔의 칼리엔테 티와 과자로아침식사를마쳤다.한국모녀는딸이이틀에한번씩
닭죽을 만드는데 같이 먹자며 여기서 12km 떨어진 아스토르가 (Astorga) 의 알베르게에서 함께
묵자고 했다. 어젯밤 감기가 덧나 뜨거운 음식을 먹고도 싶었지만 나는 주교좌 성당이 있고
역사적인 도시인 아스토르가를 돌아보고 여기서 22km 정도인 산타 카탈리나 데 소모자 (Santa
Catalina de Somoza) 를 갈 예정이어서 고마운 마음만 전했다.
다행히 발과 무릎에는 별 이상이 없어 걷는 데에는 거의 문제가 없었다. 오늘 가는 길은
카미노에서 평화롭고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길로 들어서게 된다는 곳이었다. 20분 정도
올라오니 숲길이 시작되는 고개 마루에 어제는 못 보고 지나쳤던 한국의 서낭당 같은 곳이
있었다.
완만한 경사의 숲길과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나뭇잎에 매달려있는 빗방울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신선한 공기가 느껴지는 아침이었다. 멀리 밀밭이 보이는 작은 호수를 지나며 넓은
들판으로 올라서니 푸른색 천막이 보이고 그 안에는 도네이션 음식들이 있었다. 주인을 대신한
듯 고양이 한 마리가 서성거리고 있는 천막 안에는 과자를 비롯해 티, 음료수, 오렌지, 바나나
등과 기부금 박스가 놓여 있었다. 티와 바나나를 먹으며 성의 표시를 하였다. 그리고 발목을 다쳐
걸음이 늦은 한국 모녀에게 약과 반창고를 나누어주고 여기서 잠시 쉬어 가겠다는 그녀들과 작별
인사를 하였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기쁨의 산 (Monte de Gozo) 언덕에 있는 돌 십자가에 도착했다. 산토
토리비오 십자가 (Cruceiro de Santo Toribio) 였다. 5세기에 아스토르가의 주교였던 토리비오 주교가
누명을 쓰고 마을에서 추방당하면서 신발을 닦으며 아스토르가의 것은 먼지까지도 다
털어버린다고 외친 지점이었다. 후에 주민들이 누명을 벗은 주교를 기리는 뜻에서 십자가를
세웠다.
큰 자갈들이 깔린 넓고 경사진 길로 내려오니 다시 옥수수밭이 펼쳐진 마을로 이어졌다. 기차
길 위로 철재 육교를 건너 밤나무를 가로수로 심어 아까운 통통한 밤들이 땅에 흩어져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 아스토르가로 들어섰다. 세비야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성지 순례코스와 만나는
지점인 이 도시는 얼른 보아도 예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원래 켈트족의 거주지였다가
로마인들의 거점이 된 아스토르가는 옛 로마의 자취가 남아 있는 지방으로 스페인 북부 광산에서
채굴한 귀금속을 본국 로마로 운송하기 위한 수송의 전략 지점이었다. 옛 로마 박물관으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나는 우선 일요일 낮 12시 미사가 있는 아스토르가 주교좌 산타 마리아 성당 (Cathedral de Santa
Maria) 으로 향했다. 12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 고딕, 바로크 양식을 고루 적용 한 성당이다.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진 성당 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중심가 비스듬한
언덕 아래에서 보였다. 나도 광장을 가로질러 막 성당 문을 들어서는데 미사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열두 번을 울리며 일요일 정오 미사가 시작되었다. 경건하고 엄숙한 주교님의 미사
집전에 이어 성체를 모시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가지니 카미노에서 얻은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주교님은 신자 석 뒷자리에 일렬로 앉았다가 성당 복도에 나란히 서 있는 세 명의 순례자들에게
온화한 미소와 더불어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추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미사가 끝난 후 불이 꺼진 성당에서 잠시 묵상을 하고 나오는데 휠체어를 탄 할머니와 옆
의자에 앉아있는 할아버지가 고개 숙여 기도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갈 수밖에 없는
삶의 끝자락에서있는것같은저분들은무슨기도를할까?희망을가지고할머니의쾌유를비는
기도일까? 세월과 더불어 산 인생에 대한 연민일까? 회의일까? 움직일 기색이 없는 그분들을
잠시 바라보고 성당을 나오니 전혀 다른 세계인 것처럼 관광객들로 붐볐다. 나는 줄을 서서
기다리며 성당 옆에 위치한 팔라시오 에스코팔 (Palacio Episcopal) 궁전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건축가인 가우디가 1889년에 지은 건축물이었다. 지금은 카미노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입장료는 3유로였다.
중심지 양쪽에 모양도 색깔도 다양한 초콜릿, 케이크, 기념품 가게들을 지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한 다음 초콜릿을 사며 시간을 보니 2시가 다 되었다. 로마 박물관과 유명한초콜릿공장
등을 돌아볼 예정이었지만 삶이 그렇듯이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오늘은
일요일 미사만으로도 만족하며 옛 향기를 곳곳에서 느끼게 하는 골목의 오래된 성벽, 중세기의
유적지 등 몇 군데를 돌아보며 멋진 도시를 빠져 나왔다.
다시 시작되는 내리막길 끝자락에 있는 어느 건물 앞 비석에 여러 나라 글과 나란히 한글로
‘신앙은 건강의 샘’이라 씌어 있었다. 잠깐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종이를
흔들며 내게로 오고 있었다. 상점에서 산 초콜릿 맛이 입에 살살 녹아 주머니에 손을
들락날락하다가 떨어트린 오늘의 메모용지였다. 변화무쌍한 이 지방의 날씨로 인해 시시각각
다르게 반응해야 하는 내 몸의 상태 때문인지 숙소에 들어가면 생각이 나질 않아 기회 있을
때마다 적어 놓는 노트 한 장이었다. 나누어준 초콜릿이 맛있다는 브라질 청년과 누가 더
고마운지 모르는 “Thank You”를 서로 번갈아 하며 잠시 길동무가 되었다. 한국을 방문하고
싶은데 브라질에 소개된 책자가 별로 없다는 청년은 몹시 초췌하고 피곤해 보였다. 26일
스페인을 떠나야 한다는 청년과 무사한 순례의 길을 마치기를 바란다며 헤어졌다.
다시 고요하고 평화로운 들판과 산길이 반복되는 길을 걸었다. 스스로 치유하고 적응해나가는
몸과 마음의 여유로움을 느끼며 한발 한발 내딛는 나의 조심스러운 보폭으로 오늘의 목적지 마을
입구에 다다랐다.
한 농부가 무리를 벗어나려는 양떼들을 이리저리 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