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2일
문명의 이기가 전혀 없는 알베르게
SANTA CATALINA DE SOMOZA → MANJARIN 22KM
어젯밤 탱탱하게 싸 놓은 배낭을 들고 식당으로 나왔다. 처음며칠동안은큰사과,작은사과의
작은 무게 차이로도 배낭의 무게와 싸우며 걸었는데 이제는 2~3kg을 더 넣어도 별 차이를 못
느끼며 더 이상 무게와 씨름하지 않았다. 물도 큰 병으로 넣고 어제 슈퍼에서 산 충분한 간식을
등에 지니 마음이 놓이다 못해 흐뭇해졌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철에 어머니가 여러 가지 김장
김치 등을 장독에다 담가 놓으시고 흐뭇해 하셨던 생각이 나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늘은 해발 1,504m의 고지에 있는 유명한 크르주 데 페로 (Cruz de Ferro) 의 철 십자가를 향해
걸어 갈 예정이다. 카미노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돌무덤 위에 세워 놓은 철 십자가인데
순례자들이 집에서 가지고 온 돌을 올려놓으며 소원을 비는 곳이다.
그동안 나를 스쳐 지나간 여러 순례자들과는 한 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는데우연히세번이나
같은 알베르게에 묵은, 레온시에서 출발한 핀란드 자매와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알베르게를
나왔다.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마을을 벗어나 찬란한 해가 서서히 떠오르는 카미노로
나왔다. 여명의 아침이었다. 나란히 혹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60대 여자 셋이서 보조를
맞추며 계속 높아지는 언덕을 넘고 넘어 12시 30분쯤에 1,150m의 고지에 있는 라바날 델
카미노 (Rabanal del Camino) 로 들어섰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간식으로 산 빵과 뜨거운 수프로
점심 식사를 했다. 나는 이 마을을 몇 군데 둘러보고 싶어 그녀들과 다음 알베르게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세월의 더께로 햇살을 받은 돌길들이 유난히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오후의
정적 속에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묵고 가셨다는 베네딕도 수도원인 순례자 명상의 집과,
그레고리안 성가로만 미사를 드리는 12세기에 건축된 성당을 둘러보았다.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작지만 종교적으로 견실했던 순례자를 위한 분위기가 곳곳에서 물씬 풍기는 마을이었다.
집집마다 고유 번호가 있는 문화재로 유네스코와 국가에서 관리하여 10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을 전체가 잘 보존된 상태로 유지 되고 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고도가 점점 높아지는 산길을 따라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
폰세바돈 (Foncebadon) 에 이르렀다. 언제 만들었는지 아직도 마을 이름이 적힌 사인은 깨끗하게
남아 있었다. 잠시 앉아 무너진 돌담과 마을의 잔재들이 남아있는 황량한 벌판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인 예쁜 마을 이었을 텐데….
다시 숨이 차고 힘들게 산맥을 넘어 카미노에서 널리 알려진 1,504m의 크르주 데 페로의 철
십자가에 도착했다. 순례자들이 쌓아 놓은 엄청난 돌무더기 위, 나무 기둥에 철 십자가가
박혀있다. 100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페레그리노 (Peregrino, 순례자) 들이 험준한 산맥을 넘어와
이곳에서 소원을 빌었을까?
옛날 켈트족들은 산 언덕 위에 돌무덤을 만들어 산의신에게소원을빌었다고한다.그후로마
시대에 이르러 신전을 만들어 길의 신에게 소원을 빌었는데 훗날 어느 수도사가 십자가로 대체
하였다고 한다.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순례자들은 집에서 가지고 온 돌을 돌무덤 위에
올려놓으며 소원을 빈다. 순례자들이 소원을 적은 돌멩이들과 종이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또한 순례자들이 놓고 간 소지품들도 기둥 위에 걸려있거나 여기저기 놓여 있다.
나는 소원을 적은 돌과 종이를 준비하지 못해서 아무도 없는 철 십자가 아래 돌무덤에 다리를
쭉 뻗고앉아살았던세월보다훨씬짧을,남은날들의소원을차례차례적어내려갔다.쓰다보니
소원이 아니라 내가 실행하고 싶은 일들이었다. 팔을 뻗지 않아도 손만 내밀면 닿을 수 있는
주위의 평범한 일들이었다. 나는 종이를 돌돌 말아 돌무덤 맨 꼭대기로 올라가 쌓여 있는
돌멩이들을 헤치고 깊게 묻어 두었다.
여기 적혀 있는 이 많은 소원들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적는 순간부터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적었을까? 아니면 오래 전부터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던 것이었을까? 다시 주위의
잘생긴 돌멩이를 찾아 돌무덤 위에 올려놓으며 식구들과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를
드렸다. 아울러 며칠 남지 않은 순례의 길,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하였다.
산길은 물론, 40분쯤 철 십자가에 머무는동안에도두명의자전거순례자외에는한사람도볼
수가 없었다. 신기하게도 순례의 길을 걷는 동안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내 안에 감돌고
있었는지 아무도 없는 적막한 산길에서도 두려움과 공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3km 정도를 다시 걸어 오후 5시경에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5,000km’ 라는 팻말이 있는
만자린 (Manjarin) 입구에 당도했다. 마을이라기보다 비스듬한 언덕 위에 오직 이 알베르게만이
오두마니 서 있었다. 세 명의 순례자들이 밖의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시며 반겨주었다.
핀란드자매는 기다렸다며 “Welcome to Hilton hotel, Rosa”하고 반가워하였다. 환경이
열악하다기 보다 옛날의 순례자 숙소가 어떠했는지를 실제로 보여주는 현대 문명 이전의
알베르게 같았다. 많은 순례자들이 카미노에서 가 볼만한 명소 중의 하나라고 하면서도
둘러보기만 하고 지나치는 이곳에 묵게 되었다. 해발 1,500m에서 바라보는 이곳의 전경은
자연이 인류에게 주는 최상의 절경일 것 같았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아래층 흙 바닥에는 형편없는 침대 몇 개가 있었고, 낡고 오래된 나무
사다리로 올라가야 하는 다락은 매트리스들만 깔려 있는 돌로 지은 움집이었다. 램프 불과
장작을 피우는 난로가 있었고, 방 입구에는 한국 사람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핀란드 자매, 스웨덴 젊은 여자, 아일랜드남자,독일남자,나모두여섯명이저녁식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기다리며 난로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종소리를 듣고 몇 발자국 떨어진 부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여러 가지 자디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나무와
지푸라기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곳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곳 역시 중세의 분위기가 이런
것이었나 싶게 당시 모습을 상상하게 하는 옛날 용기들이 부엌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고, 몇백
년은 된 것 같은 벽난로에서 장작불이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녁은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주인인 토마스씨와 자원봉사자가 만들어준 즉석 수프와 야채, 볶음밥과 와인을 곁들인
만찬이었다.
템플 기사단의 후예라는 토마스씨는 그림들을 보여주며 템플 기사단과 십자군 전쟁의 내력을
이야기 하는 듯 했고, 스페인어 몇 단어만 안다는 위트가 넘치는 아일랜드 사람은 재치 있는
통역으로 재미있고 유쾌한 저녁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식사를 마친 우리는 빛이라고는 전혀
없는 깜깜한 밖에서 조그만 손전등에 의지해 더듬거리며 방으로 돌아왔다.
등에 살얼음을 대고 있는 것 같이 떨고 있는 나를 배려해 주는 핀란드 자매가 장작불 온기가
위로 올라가 조금 훈훈하다는 2층 다락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많이 낡아서 뻐걱거리는 사다리를
서로 부축하면서 허리를 펼 수 없는 높이의 2층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우리 셋은 이 순간부터
내일 아침까지 바깥 외출은 행동을 같이 하자며 한바탕 웃었다. 젊었을 때 경험했다면 순례의
길에 좋은 추억거리로 평생 잊지 못할 장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텐데,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이 밤을 추억으로 만들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의 경험인 것 같았다.
스웨덴 여자는 해발 1,500m 고도에서 밖의 의자에 누워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다
자겠다며 침낭을 들고 나갔다.
2012년 10월 23일
길에 중독이 된 것 같다
MANJARIN → PONFERRADA 24KM
식사를 알리는 종소리와 더불어 아침 식사를 하고 기부제로 운영하는 만자린 알베르게에
성의를 표시하고 나왔다.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몸이 괴로우면 감동이 희미해지는데….
하얀 안개가 휘돌아 감돌고 있는 푸른 계곡 아래 경치는 더 없이 경이로웠다. 어떤천재화가가
이 아름다운 자연을 표현할 수 있을까? 떠오르는 찬란한 햇살을 뒤로 하며 신선한 아침 정기로
가득 찬 산속의 오솔길을 걸었다. 30분쯤 지나니 안개로 앞이 희뿌옇다. 왼쪽 절경의 산 계곡
아래는 온통 짙은 안개로 덮여 구름 바다가 되었다.
별안간 어지러워지면서 쓰러질 것 같았다. 죽음은 어느 순간에도 찾아 올 수 있다는 생각에
비스듬한 언덕의 오른쪽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여기서 죽으면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절대
없으란 법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훗날 내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으로
잠시 이런저런 죽음과 벗을 하고 걸으니 죽음이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아니라항상내곁에서
내 삶이랑 같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삶의 생각으로…. 후다닥 제 정신으로
돌아와 배 아픈데 두통약을 먹는 것 같이 비상약으로 준비해 간 우황청심환을 얼른 입에 넣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힌 산등성이에서 심호흡을 하며 잠시 앉아 있었다.
해발 1,500m의 내리막길, 내가 이번 카미노를 걸으며 제일 무서웠던 구간이었다. 그동안은
힘이 들었지 무서웠던 순간은 별로 없었다. 자갈들이 굴러 다니는 경사진 돌길로 이어졌다. 혹시
넘어질 순간을 대비해서 양팔을 벌리며 잠바 소매 끝으로 양손을 감싸고 중심을 맞추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까 봐 이리저리 불쑥불쑥 튀어 나온 돌부리를 피해 지그재그로 땅만 보며
내려갔다. 몇몇 젊은 사람들이 “Are you OK?” 하며 지나갔다. 그들은 중력을 이용해서 가볍게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느 비평가의 말이 떠올랐다. 어떤 돌이
누구에게는 디딤돌이 되고, 어느 누구에게는 걸림돌이 된다는….
7km를 세 시간 동안 걸어 엘 아세보 (El Acebo) 로 내려오니 온몸이 땀으로 얼룩졌다. 앞서 가던
핀란드 자매는 여름 복장으로 갈아 입고 한숨을 쉬며 카페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국인 젊은
남자 두 명이 배낭을 메고 막 떠나려고 하다가 나를 보더니 반색을 했다. 선교사들로 한국
감기약과 프린트한 엽서를 주면서 하루에 30km 정도를 걸어야 한다며 부지런히 떠났다.
칼리엔테 티를 마시며 엽서에 실린 여러 가지 좋은 말들 중에 이 말을 메모종이에 적어보았다.
To be a Christian is to try to imitate Jesus within our own limitations.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 안에서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처럼 지금 내 몸의 상태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까만 지붕들로 이어진 예쁜 집들을 벗어나 다시 경사길로 내려갔다. 더욱 무서웠던 것은
몸살 감기로 눈에 이물질이 낀 것같이 시야가 선명하지가 않은 것이었다. 어려운 순간이 닥치니
전 생애가 이 내리막길에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살아가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인생의 극히
일부분일 뿐인 그 일에 삶의 전부인 것처럼 매달리게 되고, 극복하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리고, 견디지 못하면 상처로 남을 것이다. 서로 돕고 사는 사회 속의 카미노지만 홀로
내려가야 하는 인생길이었다. 넘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 발걸음을 행진하는 높이로 직각으로
올렸다 내렸다 하며 9km를 다섯 시간 정도 걸려 몰리나세카 (Molinaseca) 로 내려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물 한잔으로 잠시 희열을 느껴보았다.
여기서 나를 붙드는 핀란드 자매와 이별을 하였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서로 큰 힘이 되었던
그녀들과의 헤어짐은 오랜 시간 마음에 남아 있었다. 4시 30분쯤 다시 8km 거리에 있는 다음
마을을 향하여 떠났다. 여기서부터는 평지였다. 이 몸으로 좁고 추운 알베르게로 들어가
웅크리며 떨고 있느니 차라리 걸으며 치유를 하고 싶었다. 길에 중독이 된 사람 같았다. 길가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카미노 프란세스에서 중세의 외관이 제일 잘
보존되고 있다는 아름다운 몰리나세카 마을을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저녁 7시가 조금 지나
목적지인 폰페라다 (Ponferrada) 로 들어왔다. ‘철교‘라는 뜻을 가진 폰페라다는 고대 켈트족 마을이
있었던 오래된 도시였다. 로마 시대에는 거대하게 발전했다가 9세기 이슬람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던 이 마을은 19세기에 복원되었다.
마을에 들어와서도 한참을 헤매다 돌다리를 건너 찾아간 알베르게에서 크레덴시알에 스탬프와
약도를 받아 호텔을 찾아 나섰다. 약국에 들려 목 감기약과 슈퍼에서 저녁거리를 산 다음
절실하게 필요해서 찾아 들어간 호텔방에는 욕조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