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 26일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다
LA FABA → FONFRIA 19KM
아침에 일어나니 사방이 깜깜했다. 헤드 랜턴을 잃어버려 휴대전화기로 빛을 비추며 시간을
보니 6시 20분이었다. 침대 옆으로 몇 계단 위에 있는 인디안 스타일 화장실이라는 곳을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 양치질만 하고 내려왔다. 여기서 기거하는 두 아가씨와 근영이 학생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옷을 전부 껴입고 자는 것이. 오늘 아침도 특별히 떠날 준비를 할 것도
없이 배낭을 들고 부엌이 달린 식당으로 나왔다. 예전에 가수였다는 주인아저씨가 이른 아침부터
생음악으로 들려주는 스페인 노래를 들으며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 앞에서 주인이 만들어준
커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끝냈다.
순례객은 오직 근영이 학생과 나뿐이어서 오늘은 어쩔 수 없이 혼자 떠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몇 시간은 순례자들을 만나기 힘들 것 같았다. 순례자들은 대부분 도시나 큰
알베르게에서 묵었다. 산속에 있는 이런 조그만 알베르게는 마을에서 10~15km 떨어져 있어서
그들을 따라 잡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인적도 없이 정적에 싸여있는 외진 시골 마을에서 혼자
나오려고 하니 조금 움츠러들었다. 메모 정리를 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려 8시 30분에 알베르게를
나왔다.
순례의 길을상징하는노란화살표를혹시놓칠까봐두세번확인하며정적에싸여있는조그만
시골 마을을 벗어나니 바로 가파른 숲속언덕길로연결되었다.사방을감싼푸른숲과그사이로
아침 공기를 녹이며 비치는 햇살, 반짝이는 아침이슬, 쌉싸름한 살아 있는 풀 냄새, 깨어나는
아침의 아름다운 자연속에서 혼자 오르는 산길이었다. 큰 지장 없이 걸을 수 있고 감기도 어느
정도 사라진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에 모든 가치를부여하고싶은상쾌한아침으로
변하였다. 매일 저녁 이 밤을 지나면어떤새로운하루가펼쳐질까하는기대와설렘속에서잠이
들었다. 어제도 역시 잠자리에 들면서 이 아침이 밝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해발 1,332m를 올라가야 하는 좁고 가파른 자갈길 언덕이지만 새롭게 해가 솟는 아침이고
기분도 여유로우니 그다지 힘들지가 않았다. 정말 앞뒤로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언덕을
올려다보니 새로운 희망의 언덕으로 보였다. 사람은 꿈꾸기를 멈출 수가 없나 보다. 저 힘든
고개를 넘으면 다른 새로운 세계가 있겠지. 그러면서 실망하며 좌절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꿈과
희망을 간직하고 기대하며 인생길을 가고 있다. 나 또한 지금 꿈과 희망을 안고 언덕너머의
세상을 기대하며 나만의 인생길, 내가 걸어야 할 길, 카미노를 걸어가고 있다.
다시 나타나는 발 아래 펼쳐진 계곡의 장엄한 경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였다.
파란 하늘 밑 골짜기로 흐르는 안개, 옅은 안개에 감싸인 단풍든 색색의 나무들, 그 사이를
파고드는 햇빛을 받으며 흐르는 물줄기. 구름이 흘러가고 있는 레온 주의 마지막 산속 마을인 라
라구나 (La Laguna) 를 지났다. 오전 10시 40분쯤, 갈리시아라고 쓴 표지석을 지나면서 산티아고로
가는 마지막 경유지인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오자 옅은 안개가 짙은 안개로 변하였다.
갈리시아 지방은 기원전 135년경 로마가 점령하기까지 이곳에 정착했던 켈트족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지방으로 일 년 내내 비가 내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내려 강우량이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안개가 짙어졌다. 몇 미터 정도마다 신비스런 분위기인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하얀 안개 문을 통과하며 11시 30분쯤 드디어 1,330m의 정상에 있는 오
세브레이로 (O Sebreiro) 에 도착했다. 안개에 휩싸여 있는 마을의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이 지역은 바람이 심해 낮은 지붕과 돌로 지은 집들이 오밀조밀 들어선 예쁘고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팔로사 (Paloza) 라 불리는 켈트족의 전통 가옥이 보였다. 산의 강한 바람을
잘 견디도록 만든 낮고 둥근 벽 위에 원뿔형 초가 지붕을 올렸다. 요즈음은 간혹 전통 훈제
소시지와 햄을 만들기도 하는데 초가 지붕 사이로 연기가 빠져 나가도록 굴뚝을 만들어 놓았다.
오 세브레이로 마을은 9세기 중반부터 베네딕도 수사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며 순례자들을
위해 봉사했다는 작은 마을이다. 산 정상에는 전설이 깃든 성배를 보관하고 있는 산타 마리아 라
레알 성당 (Iglesia de Santa Maria la Real) 이 있다. 9세기에 세워진 카미노에서 제일 오래된
성당이다. 14세기 한 가난한 농부가 폭풍을 무릅쓰고 미사를 드리러 먼 길을 달려 성당으로 왔다.
미사를 집전하던 사제가 그를 빵과 포도주를 얻어먹으러 온 사람으로 생각하고 업신여겼다.
그러나 성체를 모시는 순간에 성체는 살로 변하고 성배에는 포도주가 붉은 피로 변해있었다. 이
기적을 보기 위해 마리아 상이 머리를 기울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면서 오 세브레이로 마을이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 기적은 유럽 전체에 알려졌고 이사벨라 여왕은 성배와 성체를 담았던 접시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성배를 실은 노새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본 여왕은 하느님의 뜻이라 하여
그대로 산타 마리아 성당에 현재까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많은 촛불을 밝히며 성배가 모셔져 있는 제대 앞에 30분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많은
것이 떠올랐다. 나는 이번 순례의 길에서 많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모든 것이 감사했다. 발의
물집과 힘들게 하던 허리 통증도 한 이틀 후 사라져버렸고, 심한 감기가 들어도 앓아 눕지 않고,
걸어 다니면서 회복이 되는 등 하루도 낙오 없이 지금까지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이 모든 것이
감사했다. 특히 내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여건 등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들이 모두 너무 감사했다.
성당을 나오니 부부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였다. 안개는 걷혔지만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오늘
가야 할 폰프리아 (Fonfria) 까지 12km남았다. 비스듬한 숲 속길로 이어지는데 별안간 대낮인지
한밤중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며 컴컴해졌다. 30~40분 동안 카미노의
상징인 노란 화살표가 안 보여 길을 잘못 들어 선 것은 아닐까 마음을 졸이며 계속 올라가는데
쓰러진 통나무에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우리의 인생길도 갈팡질팡
하는 순간에 이렇게 분명히 가야 할 이정표가 나타나 준다면….
얼마를 계속 올라가 해발 1,270m의 알토 데 산 로케 (Alto de San Roque) 산마루에 도착했다.
바람을 가르며 걸어가는 순례자의 청동상이 우뚝 서 있었다. 수많은 순례자가 지나쳤을 이
언덕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나 혼자뿐이었다. 거대한 고독의 시공간 속, 구름이 잔뜩 끼고 비까지
흩뿌리며 바람이 가시지 않는 이 언덕에 오늘은 자전거 순례자도 보이지 않았다. 청동상도
바람에 날아갈까 한 손은 모자를 붙잡고 있었다.
목가 풍인 전원 경치가 간간히 이어지고 갈리시아의 전통 가옥과 평원에서 소들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평화로운 모습이 보였다. 최초의 순례자 병원이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이 병원이라는
뜻인 오스피탈 데 라 콘데사 (Hospital de la Condesa) 로 들어왔다. 돌 지붕 위에 십자가와 종탑만
달려있는 작은 성당은 오래된 유적으로만 남아있는것같았다.이마을바에서점심에먹은감자
수프는 아주 맛이 좋았다.
구름과 바람을 동반한 흐린 날씨 속에서 고즈넉한 산속의 마을들을 지났다. 드문드문 서 있는
집들이 무척이나 외로워 보였다. 다시 5km를 더 걸어 오늘의 목적지인 해발 1,300m에 평평하게
이루어진 폰프리아 마을로 들어섰다. 구슬픈 소 울음 소리가 먼저 반기는 이곳은 분뇨 냄새로
가득했다. 카미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오늘의 알베르게를 찾아갔다. 2인용 방이
26유로라고 해 마을 입구에서 만난 훤칠한 독일 아가씨와 13유로씩을 내고 한 방에 묵기로 했다.
배낭을 내려놓고 식당으로 들어가 이곳에서 만난 한국 사람을 포함하여 일곱 명의 순례자와 한
테이블에 앉았다. 우리나라의 근대나 시금치 국과 비슷한 갈리시아 지방의 수프와 갈비찜과
비슷한 맛을 낸 심심한 고기 요리는 그동안 그리웠던 고향 음식을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식사가 끝난 후 휴가를 내서 카미노를 걷는다는 한국의 젊은 남자가 나에게 “지팡이를 안
가지고 다니는 로사씨 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카미노에서 지팡이를 안 가지고 다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고 이름이 외우기 쉬워서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한테 전해들은 것
같았다.
계속 뜨거운물과스팀이나오는이곳은내가지금까지묵은알베르게중거의최고의알베르게
였다.
2012년 10월 27일
산속에 서 있는 십자가들
FONFRIA → SAMOS 19KM
꿈결에 들리는 듯한 천둥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나니 창문에 부딪치는 빗방울 소리와 함께
얼굴을 내 쪽으로 두고 자는 독일 아가씨의 코 고는 소리였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2인용 방이어서 편하고 조용할 줄 알고 좋아했더니 이런 변을 당할
줄이야. 불을 켤 수도 없어서 꼼짝없이 누워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할 판이었다.
어젯밤부터 내리던 비는 오늘 아침 7시쯤 그쳤지만 아침부터 짙은 안개와 강풍이 몰아쳐 벌써
한겨울이 온 듯 몹시 추웠다. 일교차가 심해서 하루 낮과 밤 사이의 온도 차가 섭씨 20~25도나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매 순간 부딪치는 여건에 단련이 되어서 지금 이런 상황에서도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수 있었다. 저녁이면 체력이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밤에는 불편한 잠자리에서도
충전이 되고 아침이면 다시 걸을 준비를 하고 나설 수 있었다.
아침 8시쯤 비옷을 걸치고 다섯 명이 같이 알베르게를 나왔다. 마을에서도 짙은 안개로 시야가
좁아서 노란 화살표가 잘 보이지 않아 서로 이리저리 헤매다가 교차로의 아스팔트길로 나왔다.
길을 잘 아는 듯한 스페인 남자가 앞장서 길잡이를 하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갔다.
바람 소리와 판초들이 강풍에 휘날리고 부딪치는 소리와 빠르게 스쳐가는 자동차 소리들이
무섭게 들렸다. 차갑고 습한 안개가 얼굴과 눈에 부딪혀 눈앞이 흐릿해졌다. 다시 감기가 들까
무서워 수건을 입에 물고 바람을 막았다. 찻길 옆 인도를 다섯 명이 줄지어 걸어갔다. 나는 세
번째로 걷는데 앞장서 가는 순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심했다. 계속 앞 순례자만 따라
50분쯤 걸은 다음 찻길을 벗어난 시골길을 한 시간쯤 더 걸어 산속으로 접어 들었다.
밤나무가 숲을 이룬 산길을 얼마쯤 걸었는지, 다시 급경사의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안개는
서서히 걷혔지만 바람은 계속 세차게 불었다. 지난밤과 새벽에 온 비 탓에 내리막의 돌길이 젖어
있어 미끄러질까 봐 더럭 겁이 났다. 해발 1,300m 고도에서 거의 600m 고도까지가 내리막
비탈길의 연속이었다. “부엔 카미노” 하며 앞서 가던 순례자들의 모습이 사라진 언덕을
나만큼이나 쩔쩔매는 폴란드여자와 서로 엉기며 거의 주저앉다시피 하여 언덕을 내려왔다.
폴란드 여자는 발의 통증으로 돌부리에 부딪칠 때마다 비명소리를 냈다. 그래도 무사히 7~8km의
무서운 내리막길이 끝나고 트리아카스텔라 (Triacastela) 에 12시쯤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기이한 형상의 나무 앞에서 잠시 앉아 아직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목에 걸고 다니는 복대 안의 여권과 돈이 땀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등산화를 벗은 폴란드
여인의 발가락들은 벌겋게 부어 오르고 물집으로 엉망이었다.
이 마을은 지금은 없어진 세 개의 성이 있었다 하여 트리아카스텔라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13세기 알폰소 9세가 사람들의 정착을 허락하면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순례자 감옥이 있었던 곳이다. 중세 순례자들은 이 마을 채석장에서 캐낸 돌들과 석회석들을
여기서 100km 떨어진 갈리시아 지방까지 운반하여 화강암과 같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 옛날 신앙인들의 숭고한 믿음을 잠시 상상해 보면서 입구를 꽃 화분들과 천사의 조각품으로
장식한 예쁜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를 하며 자료와 지도를 확인하고 휴식을 취했다.
이 마을에서 22km 떨어진 사리아 (Sarria) 로 가는 길과 10km 떨어진 사모스 (Samos) 로 가는 길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사리아 도시와 사모스 중간마을에는 알베르게가 없다 하여 폴란드 여자와
나는 조금 이르지만 사모스로 가는 국도를 택했다. 물집으로 걸음이 늦은 그녀와 보조를 맞추며
차도 옆의 순례자용 도로를 얼마쯤 가다가 다시 산 크리스토보 (San Cristobo) 산속 마을로
접어들었다.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오면서 거의 폐허가 된 듯 텅 비어 보이는 마을들은 가난하고 분뇨
냄새로 가득했다. 폐허가 된 마을인가 싶으면 허름한 집에서 노인이 개를 한두 마리씩 데리고
나왔다.
밤나무 숲과 밤송이들로 범벅이 된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1~2km마다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을마다 폐쇄가 된 듯한 성당 마당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이 산골 구석구석까지 산재한 유적들과 성당들은 스페인의 가톨릭 역사와 스페인 사람들의
신앙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상상하게 했다. 마을이나 성당마다 대대로 내려오는 종교의
역사와 전설은 스페인 사람들의 삶 자체였던 것 같았다. 산속 길에 수없이 세워진 십자가와
순례자의 무덤들이 가는 길을 숙연하게 했다. 일생 동안 신앙생활을 하였을 그들의 삶이
자연스러워 보이는 십자가 없는 무덤은 없어 보였다.
렌체 (Renche) 를 지나 바닥에 사모스 방향의 노란 화살표 사인이 있는 언덕에서 푸른 숲 속에
둘러싸인 거대한 수도원이 보였다. 오후 3시 30분쯤 오늘의 목적지 사모스에 도착하였다. 마을
입구에서 오른쪽으로 강을 끼고 있는 수도원은 마을 전체가 수도원인 듯 그 규모가 굉장히 컸다.
산 훌리안과 산타 바실리사 왕립 수도원 (Real Abadia de los San Julian y Santa Basilisa) 이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수도원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갈리시아 지방의 문화의 상징이며
6세기에 지어 증축을 거듭해 스페인에서 규모가 제일 큰 수도원이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때
군 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20세기 초 발생한 화재로 거의 소실된 내부를 1951년
재건하였다. 초기 건물의 일부는 지금까지도 그당시의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어 있다.
베네딕도 수도회가 운영하는 알베르게는 수도원 본관 뒤편에 있었다. 90명을 수용하는
알베르게 시설은 중세의 모습 그대로인 듯 고풍스러워 역사 속에 들어간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 분위기에 그레고리안 성가가 울려 퍼지니 내가 중세의 신앙심 깊은 여인이 된 듯
했다.
그러나 그곳이 너무 추워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만 받고 폴란드 여자와 바로 건너편에 있는 사설
알베르게로 갔다. 하룻밤에 10유로였다. 그녀는 물집과 복사뼈의 통증으로 침대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수도원 내부의 정기 투어가 있다 하여 바로 수도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오늘은 오후 3시에 문을 닫았다고 했다. 5시에 문을 닫는다고 들었는데…. 너무 아쉬워
거대한 수도원 외부를 둘러보았다. 진한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는 성스러운 기운이 감돌며 옛
자취로 가득했다.
알베르게 안에 있는 식당에서 마리아와 와인을 곁들인 ‘메뉴 델 디아’로 저녁 식사를 했다.
폴란드는 전 인구의 95%가 가톨릭 신자라고 하는데 50대 중반인 그녀는 살아 생전에 카미노를
걷고 싶어 했던 남편의 뜻을 따라 순례의 길을 걷는다고 했다. 프랑스 생장피드포르에서 순례의
길을 시작한 그녀는 양쪽 발의 물집으로 병원에도 한 차례 다녀왔다고 했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삶의 의욕을 잃었다는 그녀는 얼굴에 수심이 그윽했다. 이 순례의 길 끝에 서면 그래도
어느 정도 그녀의 마음이 치유가 되어 있을까? 와인을 꽤 마신 마리아를 부축하여 새 건물의
깨끗한 2층으로 올라왔다. 한방에 네 명이 잘 수 있는 방 두 개에 우리 둘만 들어 있었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동안 밀렸던 빨래와 메모를 하며 배낭을 정리하였다.
2012년 10월 28일
아침에는 위대했던 것들이
SAMOS → FERREIROS 26KM
편안하게 잠을 잤는데 오늘 아침은 전신이 쑤시고 몸을 움직이기가 더 힘들었다. 지도를 보며
앞으로 4~5일만 더 걸으면 산티아고에 입성할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비장한 각오를 하며 배낭을
챙겼다. 오늘부터 스페인의 ‘Daylight saving time’이 시작되었다. 스페인의 달력은 월요일부터
시작이 되며 오늘부터 시간은 샬롯보다 여섯 시간이 빠르게 된다.
다행히 발에는 큰 이상이 없어 집에서 준비해 간 약, 연고, 붕대 등을 거의 쓰지 않아 물집으로
고생을 하는 마리아에게 건네주고 조금만 남겨 놓았다. 여기서 10km 정도 떨어진 사리아까지만
걷는다며 고마워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알베르게를 나왔다. 오늘의 목적지는 26km 거리인
페레이오스 (Ferreiros) 였다.
수도원 옆에 상큼한 아침기운을 받은 순례자상들이 사모스를 떠나는 순례자들을 지켜주고
있었다. 사모스에서 사리아까지는 물안개가 피어 오르는 강을 끼고 걷는 길이었다. 밤나무,
소나무와 떡갈나무로 뒤덮인 오솔길 옆의 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는
전원의 교향곡이었다. 신기하게 길에 나서면 몸이 가벼워졌다.
밤나무가 지천인 마을들이 계속 이어졌다. 마을마다 오레오 (Horreo) 라 불리는 갈리시아 지방의
전통적인 곡식 창고들이 꽤 많이 보였다. 일년 내내 비가 오는 갈리시아지방 기후 때문에 수확한
농작물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하여 만든 독특한 창고였다. 주로 감자나 옥수수를 저장하는데
지면에서 조금 높은 곳에 돌과 나무를 사용하여 다양한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다. 옛 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였다. 어느 중년 부부가 차를 세워놓고 조그만 플라스틱 통을 들고 밤을 줍는 소박한
모습과 말을 타고 길을 가고 있는 특이한 부부의 모습도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사리아는 12세기 레온 왕국의 알폰소 9세가 발전시킨 도시이다. 이곳의 막달레나 (Magdalena)
수도원은 중세부터 순례자들에게 숙소를 제공해줌으로써 카미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또한 사리아는 전구간이 아닌 단축 구간 순례를 하는 사람들이 순례를 시작하는